죽여야만 사는 인간 ― 박찬욱식 존재론적 블랙코미디
소설 『액스』 X 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The Ax)』를 20년 전에 낙점해 이미 영어영화로 시나리오를 기획했었다. 이 소설로 이미 영화를 만들었던 코스타 가브라스 부부가 이 과정에 기꺼이 협업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박 감독은 이를 크레딧 말미에 헌사로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이 소설을 박찬욱으로 하여금 영화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을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단지 실업자가 사람을 죽이는 살인 스릴러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곰곰이 뜯어보면, 이 스릴러는 정치경제학적 구조를 지닌 서사를 품고 진행된다. 소설 『액스』 초반에는 주인공이 해고된 정치경제적 배경이 서술된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로 관세장벽이 낮아지자, 기업들은 생산 설비를 임금이 낮은 지역으로 이전하거나 아웃소싱을 확대하고, 그 결과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드는 모습이 배경처럼 묘사된다. NAFTA는 통치장치 내에서 노동시장의 재배치를 수행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NAFTA는 홉스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현대적으로 펼쳐 보인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홉스적으로 본다면, 주인공의 행위는 생존을 위한 정당방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적 버전의 만인 투쟁은 아주 기묘한 형태로 전개된다. 구직 노동자는 자본가를 흉내 내며 생존의 길을 모색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구직을 위해 자본가처럼 유사한 구인 행위를 한다. 그런데 그 유사 구인 행위를 하는 이유가 걸작이다. 경쟁자들의 정보를 파악해 정확히 죽이기 위해서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결국 최고의 구직 방법은 구인을 통한 정보 획득에 있다. 이 소설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가의 구인 행위를 흉내 내게 함으로써, 잔혹성을 통해 통치장치에 적응하려는 피지배계급의 애처로운 몸부림을 표현한다. 장치에 적응하기 위한 유사 장치를 통해,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과 유사하게 불순해진다.
영화의 외견상 전개는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소설의 텍스트를 다른 공간과 시간의 영화적 문법에 맞추기 위해 세부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2차대전에 참전한 아버지의 총이 북한식 권총으로 바뀌고,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서사가 지방 외곽의 주택으로 옮겨간다. 또한 소설에서 주인공이 7명의 경쟁자를 살해했다면, 영화에서는 3명 정도로 축소된다. 그러나 우리는 박찬욱식 영화 몽타주와 미장센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지대로 나아가게 된다. 박찬욱은 영화를 통해 애초에 그를 사로잡았던 좌파적 상상력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소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를 스릴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면, 영화는 그것을 넘어서 인류학적인 차원으로 이동한다. 소설의 정치경제적 구조 밖으로, 영화는 그 구조를 비웃듯 삐져나온 반(反)구조적 서사의 귀퉁이를 드러낸다. 내가 볼 때, 살인 행위는 자본주의의 비판적 표상을 넘어 인류학적 근본 사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라고 반복되는 조용필의 노래 가사에 실려, 자본가를 흉내 내는 유사 자본가는 살인적 사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노래는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싶지”라는 대목을 반복한다. 이는 마치 ‘근원적 보호자, 기댈 수 있는 절대적 보장’의 부재를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박찬욱이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는 이 블랙코미디를 통해 인류적 비극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과연 그것은 자본주의가 끝난다고 해서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정치경제적으로 보면, 이는 국가나 제도가 더 이상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현실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에 한정된 사태가 아닐 것이라는 불안이 내포되어 있다.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착취를 기본 구조로 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하면, 타인의 파괴와 죽음 위에서라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사태가 아니라 인류적인 사태라는 점에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이상, 이미 죽이고 있었다.
소설의 우울한 정서는 영화의 블랙코미디를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 매우 존재론적인 지대, 그것도 절대적 비극성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비극성은 만수의 살인을 은밀히 응원하는 우리들의 마음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여러 갈래로 나뉘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자본주의 비판과 인류학적 전개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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