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애초에(그게 ‘우리’이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제 나는 ‘그것’이라 부르겠다) 사실 모든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는 주체가 설정되는 순간, 그 가능성은 일거에 소각된다. 어쩌면 “나”라는 엔진은 모든 가능성을 에너지로 소진하며, 곧 모든 가능성을 한 번에 써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 ‘불안’과 ‘조급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난다(주석. 사실 ‘조급함’은 불안의 결과 중 하나라서 나란히 쓰여야 할 개념은 아니지만, 때로는 불안과 조급함이 통념적으로 다르게 이해되므로 이렇게 표현하겠다). 그것은 “나”라는 지평이 설정될 때 곧장 따라붙는 존재의 소리다. 그것은 가능성 전체를 향한 안타까움, 곧 “왜 너는 이 선택으로 저 모든 가능성을 버려야 했는가”라는 슬픔의 음향이다.
그런데 “나”는 놀라운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모든 가능성을 버림과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의 배아로 다시 품게 되기 때문이다. 잠재성이란 하나의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그 관계에 의해 무한히 변형될 수 있는 힘이다. 주체는 이 잠재성을 지닌 채 단 하나의 선을 그어 나가며, 존재를 운명으로 엮어내는 길 위에 선다.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모든 잠재력을 품게 되는 것, 그것이 ‘나’라는 존재의 간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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