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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발리바르, 『개념의 정념들』

‘마르크스주의자’ 발리바르

“우리에게 마르크스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다소 낯설게 들린다. 보통은 “마르크스는 누구인가?”라고 묻기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는 아마도 마르크스를 단순히 생물학적 존재, 즉 한 개인의 생애와 저작에 한정하지 않고, 그의 사유가 남긴 역사적 흔적들 전체를 포괄하는 물음일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라는 고유명 속에 담긴 사유와 실천의 총체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했고, 그 의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이어받아 미래를 위해 활용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이후, 마르크스만큼 사유와 실천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은 드물기에, 이 질문은 20세기말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높은 수준에서 유효한 물음으로 남아 있다.

발리바르 본인은 누군가 자신을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마르크스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는 2022년 무렵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크스를 읽는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러나 어떤 정통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일원은 아니다.” 이 말은 아마도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여전히 하나의 ‘지적 전통’이자 ‘비판의 방법’으로 존중하지만, 그것을 고정된 이데올로기나 실천의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오해를 감수하더라도 굳이 어떤 ‘주의자’로 규정해야 한다면, 나는 그를 주저 없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알튀세주의자도, 푸코주의자도, 심지어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데리다주의자도 아니다. 결국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아마도 미래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철학 전반에 대해 그 위치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의 이론과 실천의 성격 자체를 변형시켰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오히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972년 역사유물론에 관한 연구(한글번역본은 2019년 배세진역의 『역사유물론 연구』이다. 발리바르를 알아야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이다)에서 마르크스 사유의 핵심인 정치경제학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다음과 같이 단언한 바 있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란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 즉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과정, 다시 말해 착취와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생산과정에 접근하는 것이며, 이 접근이 바로 역사유물론의 이론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게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이며, 오직 이 계급투쟁만이 혁명적이다. 따라서 계급투쟁만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라고 명확히 밝힌다.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흐름에 휩쓸려 흔들릴 때에도, 발리바르는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물론 그를 소비에트 공산주의나 라캉식 마오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른다면, 그것은 오직 ‘발리바르적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러야 할 것이다.

양립불가능한 마르크스와 푸코

발리바르에게는 다른 사유를 마르크스와 비교하며 분석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그는 푸코 또한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통해 비평하고 분석한다. 대표적인 예로 1997년 논문 「푸코와 마르크스: 유명론이라는 쟁점」(한글 번역본은 『대중들의 민주주의』(2007), 341~368쪽 수록)이 있다. 이 글에서 발리바르는 푸코에게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단일하거나 고정된 체계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푸코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요소를 지속적으로 문제화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이론적 기반을 형성해 갔다. 특히 그는 계급 개념을 고정된 신분이 아니라, 복잡한 권력 관계와 다양한 저항의 형태로 구성된 헤게모니적 관점에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억압과 착취라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권력의 복합성과 사회적 규범의 작동 방식에 주목하는 것으로,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과 유사한 방향이다. 물론 푸코와 마르크스 사이에는 철학적 분기점이 존재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들이 병렬적으로 사고될 수 있는 이론적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읽은 철학자들 중에서 발리바르만큼 푸코를 ‘비판적’(대상의 한계까지 밀고 올라가서 타격을 가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철학자는 드물다. 푸코주의자들도 푸코의 사유를 나름대로 잘 정리하지만, 발리바르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푸코의 사유 끝까지 따라가며 그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탐색한다. 『개념의 정념들』에서 그는 이 점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다만 이 책의 발리바르는 1997년의 발리바르와는 다소 달라진 면도 있다. 1997년의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이 푸코적 권력 분석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마르크스와 푸코를 단순히 절충하거나 통합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는 두 사상가가 ‘개인성’, ‘주체화’, ‘권력’, ‘법’, ‘역사’라는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단지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사유가 출발하는 문제 자체가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중심 개념은 생산관계와 계급투쟁을 통해 역사를 구조화하는 ‘내적 모순’이다. 그는 법적 인격이라는 추상적 개인성을 자본주의적 소외의 표현으로 이해하며, 이 모순이 혁명적 주체를 낳는다고 본다. 예컨대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형성되지만, 이 체제의 전복을 통해 해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전형적인 입장이다. 반면 푸코는 개인성이 법적·경제적 구조만이 아니라 훈육, 규범, 담론의 실천 속에서 미시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권력-지식의 네트워크는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획하며, 주체성 자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감옥 제도는 단순한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범죄자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이러한 논리는 마르크스의 계급 주체 개념과 충돌한다. 마르크스의 주체는 법과 충돌하며 집단적으로 형성되지만, 푸코의 주체는 법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미시적으로 구성되고, 새로운 법을 만들기보다는 법의 바깥으로 나가려 한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푸코-마르크스적 사유가 양립 불가능하거나 서로를 침묵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푸코에게는 혁명조차 이미 권력 안에 포섭되어 있는 기획으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말하는 ‘해방’은 푸코의 관점에서는 ‘정상화의 기획’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혁명을 통해 새 사회를 구성하고 법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결국 다시 정상화의 메커니즘을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발리바르 식으로 푸코의 후기 개념인 ‘진실의 실천(pratiques de vérité)’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제도에 대한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르게 살고 말하고 형성하는 실천을 뜻한다. 이는 기존의 ‘정상성’에 순응하지 않고, 규범에 균열을 내는 삶의 방식이다. 푸코는 이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개념과 연결한다.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 내부의 틈새에서 존재하는 대항적 공간이다. 푸코는 혁명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여기에서 내부로부터 외부를 창조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푸코는 마르크스처럼 체제를 전복하거나 혁명을 꿈꾸기보다는, 규율적 사회 내부에서 ‘다르게 살기’의 윤리적 공간을 찾은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이해하는 푸코의 모습이다(나는 여전히 여기서 아주 간단한 불만을 표하고 싶다. 그는 여전히 푸코의 후기 철학을 사회적 저항의 가능성으로서 중요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 이건 여기 논지가 아니므로….)

마르크스에게 이미 푸코가

발리바르는 “이접적 종합”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른 사유들이 충돌하면서도 새로운 통찰을 여는 긴장 상태, 즉 “화해 없는 병존”의 실천적 가치를 추구한다. 현대의 감시 자본주의 사회를 보자. 플랫폼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자유계약자’이지만, 알고리즘과 데이터 시스템에 의해 훈육되고 평가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소외’와 푸코의 ‘권력에 의한 개인성 구성’이 동시에 작동하는 장이다. 이때 마르크스와 푸코의 분석은 충돌하지 않고, 서로를 조명하며 현실을 더욱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단지 이접적 종합이라고만 해석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옳다면, 그 종합이 가능하려면 각 사유 안에 이미 서로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페미니즘의 교차성 개념도 인종, 성, 계급이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예컨대 미국에서의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해방운동은 단지 병렬적인 투쟁이 아니라, 서로 얽혀 있는 권력 구조의 두 축이었다. 그림케 자매는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결합했다. 흑인 여성 노동자의 자유 없이 백인 여성의 자유도 없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이접적 종합은 병렬이 아니라 상호 자극과 운동의 관계다. 백인 여성이라는 미시적 권력관계는 흑인 여성 노동자라는 계급적 권력관계와 상호 보완 관계이다.

이러한 교차성은 중간계급 노동자들에게도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미국 북부의 백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었지만, 사실 남부의 노예화된 노동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두 집단 모두 경제적 착취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앤젤리나는 이에 대해 경고했다. “모두가 함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으면, 모두가 함께 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이다. 이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노예정국가가 되거나, 완전히 자유로운 이들의 땅이 될 것이다.” 그녀는 노동자, 흑인, 여성의 동맹을 통해 급진적 실천을 제안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자유를 실천하는 주체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푸코가 말하는 자유의 대안 공간을 이미 살아가는 자들, 바로 그들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이 교차성의 공간은 푸코를 마르크스로, 마르크스를 푸코로 이어준다.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가 이미 푸코적인 요소를 품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헤겔 법철학 비판』의 마지막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하나의 특수한 신분으로서의 사회의 해체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낯설고 기이하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의 해체 그 자체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통적 개념들과의 위상 차이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을 설명한다. 그것은 자연적 빈민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생산된 빈민이며, 사회의 급격한 해체, 특히 중간계급의 해체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순한 해체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해체의 동력이기도 하다. 이 계급은 극단적 모순의 결과이자, 그 모순을 폭로하고 해체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특정 계급이 아니라, 해체의 과정 자체를 대표하는 존재로 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나중에 이것은 급격히 정치경제학적 계급으로만 수렴되고 고정되고 말았지만.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와 푸코를 병치하며 반복적으로 동일성을 탐색한다. 이는 단순한 내용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들의 사유 구조—즉 사고 형식의 반복성—에 주목한 것이다. 마치 이것은 프로이트의 동일성 강박처럼도 보인다. 왜 푸코를 마르크스와 비교하면서 같이 놓여야 하는가. 여기에는 프로이트의 개념, ‘지각의 동일성’과 ‘사고의 동일성’이 작동한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와 푸코의 사유 속 반복되는 정치 형상(지각의 동일성)과 그것을 관통하는 사유 구조(사고의 동일성)를 구성함으로써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 반복적 동일성 탐색은 일종의 충족 욕망, 즉 전-오이디푸스기적 환상의 반복처럼 보일 수도 있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충만한 통합 이미지로 유지하려 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철학적 구조화 속에서 분열된다. 이 분열은 독자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지키려는 충동과, 타자 철학과의 병치를 통한 구조적 동일성 욕망 사이의 긴장으로 나타난다.

결국 문제는 이렇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의 독자성을 사수하려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반복적으로 다른 사유 속에 호출하고 동일화하려 한다. 하지만 이 작업은 푸코의 마르크스주의화, 마르크스의 푸코화라는 ‘되기’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역시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 극도로 경계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푸코를 지나치게 타자화하고 마르크스를 고립시킴으로써, 이 둘의 교차와 연대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발리바르가 강조한 이접적 종합의 가능성은, 즉, 진정한 의미에서 이접적 종합의 잠재력을 동일성의 강박에 의해 갇혀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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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여기에는 『개념의 정념들』 을 끝까지 읽고 짧은 독후감을 남겨 두었다.✍️ 마르크스에게 이미 푸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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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와 푸코 – No Final Goodbye님에게 덧글 달기 응답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