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스 실드레, 『음과 음 사이에서』

나는 교회음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성당을 질기게 다녀서 성가나 오르간 연주를 듣는게 자연스럽기도 했고, 어머니께서 피아노 선생님이셔서 밤에 바흐나 그레고리안 성가 비스무리한 음악을 직접 연주든, 스피커를 통해서든 들었기 때문에 그런 음악에 익숙하긴 하다. 그러나 커갈수록 그런 음악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겨움, 답답함,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위선으로 들리는 느낌 때문에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특히 꽤 문화예술적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바흐나 그레고리안 성가를 좋아하며 듣는 것을 보곤 하는데, 약간은 자기들의 평안에만 몰두하는 무감각한 엘리트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런 취향을 반기지 않았다. 아무 잘못이 없어도 엘리트에게는 기분이 나쁘다고나 할까. 아무튼 못된 촌사람 심보가 한 구석에 있었던 것 같다.(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경우도 있다. 나름 평안한 중견 직장인이고, 또 아마 철학 이야기로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상당한 정도까지 교회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은 만큼 교회음악과 멀어지기는 어렵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사유가 종교로부터 벗어나 각성하고, 따라서 자신의 사유의 근거를 교회와 신이 아니라 자신에게서 찾기 위해서는 힘겨워도 교회가 걸어갔던 사유의 길을 되짚어 걸어가고, 그 길목마다에 있던 갈림길들을 되새기고 종교의 사유를 뒤틀어야만 한다. 더군다나 아마 교회음악은 중세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사유를 지배하고 이끈 가장 기본적인 경향일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음악에서 귀를 막고 새로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르보는 반-진보주의자이다. 아르보가 보기에 예술에는 진보라는 개념이 없다. 바흐 음악의 현대성은 앞으로 200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고, 아마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고전주의자. 여기까지만 들으면 고전을 신봉하는 흔한 교회음악가정도로 이해하고 말 수도 있겠다.

이 책을 보면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적 여정은 끊임없는 영적 탐구와 깊은 명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소비에트 에스토니아에서 자라난 아르보는 탈린 음악원에서 다성음악을 배웠으나, 학업보다는 스스로 작곡할 때 두각을 나타냈다. 학업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지 1년 유급도 되었었다고 한다. 소비에트 정부의 검열 속에서도 그는 모더니즘과 12음 기법을 실험하며 <추도사(Nekrolog)> 등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체제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애니메이션과 영화 음악에 몰두하기도 한다(내가 사실 아르보를 처음 안 것은 <그래비티>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이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아르보는 바흐와 같은 고전음악을 탐구하며 자신의 혼돈스러운 모더니즘 음악과 대조적인 콜라주 작품을 만들어 낸다. 마침내 정교회의 신앙과 그레고리오 성가에 들어서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기법(흔히 틴티나불리 기법이라고 불리는)을 확립하며 단순성과 영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열었다.
이 책에서는 그가 정교회 신자가 되기 전에 어떤 깨달음 상태에 도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존재 혹은 예술 자체를 이 세상에 마치 숫자 하나가 주어진 것으로 묘사한다. ‘1’을 예로 들어 보자. 값은 당연히 ‘1’이지만, 인간에겐 이 숫자가 복잡하게 작동하는 파편(fraction) 형태로 주어져 있다. 그래서 우린 살아 가면서 복잡한 걸 적절하게 단순화할 수 있어야 한다. 1로 무엇이든 해야 하니까.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예술가란 나에게 주어진 유한성(아르보는 파편 ‘1’이라고 상징) 안에서 이 세계 모든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아르보의 핵심인 ‘단순화’이다.
여기서 나도 아주 자그마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유한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철학자들은, 그리고 과학자들은 늘 유한한 내가 어떻게 무한한 세계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만 질문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늘 나의 유한성이 문제가 되고, 그 유한성이 도달할 수 없는 무한성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감만을 가지게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그게 모두 유한한 내가 어떻게 저기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아르보처럼 사고하면 그 질문은 사라지고 나에 대한 명령만 남는다. “유한한 내가 세계를 모두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끊임없는 질문은 사라지고, 무한한 세계를 나라는 파편 안에서 단순하게 표현하라, 파편인 나의 삶을 통해서 이 세계를 표현하라는 일종의 정언명령이 우리를 감싼다. 그거 이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아르보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음악가 외에 영감을 준 인물은 예수님이다. 자신의 파편을 이상적이고도 신성하게 단순화했다.” 아르보는 정교회의 근간이 되는 6세기 성 도로테우스의 초기 기독교 교리를 읽었다. 거기엔 기원 후 초기에 살았던 수도승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고 한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이른바 ‘사막 교부들’ 이야기. 어쩌면 기독교가 교회라는 장치에 의해서 지배되기 전 시원적인 예수의 그 정신을 공부했고 거기에 빠져 들었다는 말이 된다. 자기를 배신하고 교회가 걸어갔던 사유의 길을 되짚어 걸어가고, 그 길목마다에 있던 자기배려와 신 사이의 갈림길들을 되새기고 종교의 사유를 뒤트는 작업을 아르보는 자각적으로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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