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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네그리 추모 학술대회에 다녀왔다. 아침 일찍 학술대회 장소로 걸어갈 때만 해도, 어쩐지 내가 이런 학술대회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내가 잘못된 동기로, 잘못된 장소에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런 위화감이 암세포처럼 퍼지기 전에 학술대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고, 김강기명, 정정훈, 나중에 합류한 전주희 등 15년 전 내가 많이 배웠던 선생들이 반갑게 맞아 주셔서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게다가 윤영광 선생을 오프라인에서 처음 뵈었는데, 매우 선하고 성실한 인상이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내가 김강기명을 알던 때는 그가 신학대학을 다니며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던 1~2년 즈음이었다. 그와 함께 김영진의 『유마경』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때 김강기명은 스피노자의 존재론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불교 강의 중에도 스피노자와 연결 지어 질문하는 경우가 많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무척 좋았던 순간들이다. 어제도 그는 ‘다중’을 설명하면서 금강경의 대승적 세계관에 빗대어 해석했는데, 그 장면에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고, 나도 크게 공감했다. 유학을 포함한 오랜 세월 동안 스피노자에 천착해온 흔적이 그의 발언 곳곳에 묻어 있었다. 15년 전 수유너머에서 공부하던 젊은 친구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걸 보니, 감상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네그리의 존재론적 비대칭성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기배려의 사유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으며, 그 자기배려가 정치적 주체로서 물티투도(multitude), 즉 ‘다중’으로 형상화된다. 내가 보기엔 들뢰즈가 말했던 ‘리좀’과 네그리의 ‘다중’은 사실상 같은 개념이다. 리좀이란 위계 없이 함께 사는 방식이라면, 나무는 정해진 위계 구조에 따라 지시하고 지시받는 방식으로 움직인다. 사실 식물과 동물도 리좀 구조로 엮이고 무리 짓게 되며 생성된 창조물들이다. 린 마굴리스를 보라. 다중은 공생 그 자체다. 들뢰즈는 이 무리 속에서 끊임없이 상대방에게로 이행하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변형되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네그리가 이야기하는 다중, 즉 정치적 집합 신체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더군다나 다중은 ‘다중-되기’ 또는 ‘다중-만들기’ 그 자체이기 때문에, 리좀적 운동과도 정확히 호응한다. 김강기명은 스피노자의 실체-양태론을 기반으로 이러한 리좀적 사고와 유사한 논리를 전개한다. 물론 그의 글에서는 들뢰즈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정통 맑스주의자들, 인민주권을 중심으로 정치운동을 해온 사람들,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자들 중에는 네그리를 나이브하거나 허무맹랑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어제도 그런 비판이 여지없이 등장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네그리주의가 오늘날의 비판에 처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 철학이 존재론적 비대칭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존재론적 비대칭성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체적 수준에서의 자기배려이든, 사회적 수준에서의 다중이든, 그 정치적 행로를 지나치게 낙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가 고전적 자유주의의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오히려 시장의 효율성과 경쟁 강화를 위해 국가 개입을 정당화했을 때의 ‘구성적 자본주의’ 개념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공통적인 것은 진리이지만, 그것은 리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리좀적 에너지를 하나의 상자 안에 가둔다면, 그것은 그 안에서 질식해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우파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자연성을 극복하고, 구성적 자본주의를 창출해 지금의 세계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공통적인 것과 다중-되기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개입을 필요로 한다. 공통적인 것이 진정 공통적인 것으로 흐르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그런 맥락에서 구성적 공통주의를 주장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The Public(국가, 주권)이 The Private(소유, 시장)에만 몰두해 그것을 돌보는 데 집중하는 현상을 벗어나, The Common(공통적인 것)을 돌보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지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결국 주권적 투쟁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과제이다. 물론, 그런 주권적 투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The Common의 자생적 움직임 역시 병행되어야 한다. 결국 나는 The Common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면서도, The Public을 통해 그것을 지키고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최소한의 개입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신(新)공통주의일 수도 있으며, 그것이 미래의 코뮤니스트 통치성이 될 가능성도 있다. 공통적인 것은 결코 자연주의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자연주의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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