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없는 구원자, 욕망의 공동체
《미세리코르디아》(알랭 기로디 감독)
철학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세운다는 것은 내재성을 어떤 대상이나 주체에 귀속시키지 않고, 초월을 다시 호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유의 바닥을 놓는 일이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도 이 시도는 완결되지 않는데, 칸트는 초월적 사용을 거부하면서도 내재성을 종합하는 주체의 주관적 단일성에 이를 귀속시켜 초월을 주체 내부의 지평으로 보존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초월은 사물 위에 군림하는 유일자가 아니라, 내재성의 장이 특정 주체에 소속될 때 발생하는 반성의 형태로 지속된다. 더 나아가 상호주관성이나 공동체 속에서 초월성을 다시 발견하려는 현대의 시도는 “초월성이 내재성 안에 있다”는 주장으로 내재성을 초월성 생산 장치로 전락시킨다. 그 결과 내재성은 다시 감옥이 되고, 초월은 구원으로 여겨지는 가치의 전도가 발생한다. 아마도 내재성의 구도는 초월적 대상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망상과 세계를 의식의 소유물로 삼으려는 태도를 버릴 때에만 회복될 것이다. 그게 성공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긴 하지만.
영화 《미세리코르디아》를 이 내재성과 초월의 구도로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내재성의 구도는 이 영화의 숲과 공동체에서 하나의 공간적·서사적 형식으로 구현된다. 영화 내내 보여주는 숲의 풍경은 마음의 바깥이다. 그런데 이 숲에 들어오면 숨을 곳이 없다. 물론 안개 속에 묻혀 있지만, 숲은 마음처럼 숨겨두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곳은 아니다. 이 숲에서 뱅상은 살해된다. 그러나 안개로 가려져 있어도 곰보버섯이 자라나면서, 이 풍경 아래에서 펼쳐진 사건은 결국 표면에 드러난다. 곰보버섯은 콸콸 쏟아진 피가 묻은 거즈처럼, 시체가 묻힌 땅의 핏자국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보통 살인의 서사는 정글 깊은 곳에서 이를 갈며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악어처럼, 살인이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는 구조를 따른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인 숲과 마을은 질척질척한 흙과 단풍 위에서 벌어진 살인을 그저 세계의 일부,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것처럼 담담하게 표현해 버린다. 진흙 아래 숨겨두었던 시체는 곰보버섯을 통해 진실을 슬쩍, 그러나 위협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이 영화는 현대 서구가 그토록 강조해 온 ‘무의식’이 거의 없는 듯이 말한다. 아니면 의식이 모두 무의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투명한 무의식.

사실 마르틴과 신부, 그리고 경찰들 역시 딴전을 피우며 점잖을 빼면서 제레미를 심문한다. 그들은 심문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살인자를 찾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 심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틴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줄곧 그 마을에 머물며, 제레미가 돌아오면 안아주려고 두 팔을 벌리고 기다려온 사람처럼 보인다. 초반부 내내 주변에 머물러 있던 신부는 마치 살인을 기다렸다는 듯, 살인의 목격자로 무대 중앙에 올라서서 아주 뒤집힌 고백성사를 기묘하게 연출한다. 이 뒤집힌 고백성사는 이 영화 전 장면에서 최고의 백미이다. 그는 이를 통해 제레미를 마을에 묶어두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고백이 죄를 씻는 장치가 아니라 욕망을 정당화하는 장치가 되고, 진실을 밝히는 장치가 아니라 진실을 유예하고 공동체를 묶는 장치가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느끼는 점은, 몽글몽글 불에 구운 빵을 만들 줄 아는 제레미가 공동체의 구원자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서부영화에서 늘 마을에 등장하는 이방인 총잡이 같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인을 하고 나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공동체가 무너진 뒤에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살인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레미는 서부영화의 총잡이 구원자와 전혀 다르다. 그는 초월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공동체 위에서 굽어보며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문제를 해결한 뒤 공동체를 떠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공동체 위에서 굽어보며 공동체 내부의 규범, 위계, 감시를 대표하는 듯한 뱅상을 살해해 버린다. 그는 차라리 초월을 파괴하는 자다. 그로부터 구원의 의미는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가 구원자인 이유는 공동체를 질서로 회복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를 억압하던 초월적 위치를 제거함으로써 욕망이 다시 순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구원의 묘미는 도덕적 결론을 주지 않는 무표정, 자비와 죄의 불편한 공존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데 있다.
욕망은 투명하고 재빠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욕망을 따먹을 수 없다. 욕망은 대상을 소유하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며, 보기도 전에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고, 마시기 위해 입을 대기도 전에 흘러가버린 물줄기이다. 그렇게 흘러가는 욕망이지만, 그것들이 거세게 휘몰아칠 때에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다. 약한 욕망은 몸이 약한 날벌레들처럼 형광등 아래로 우수수 떨어진다. 그러나 강한 욕망들은 붕붕거리는 벌들의 몸짓처럼 요란하게 움직인다. 마르틴과 신부, 그리고 제레미로 구성된 이 공동체는 투명한 욕망들로 가득 찬 욕망의 공동체이다. 여기서 살인은 욕망을 활성화하는 가능성의 조건으로 작용한다. 사실 도시는 시시한 욕망들만이 돌아다닌다. 그러나 시골 공동체에는 아주 기묘하고 매력적인 욕망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욕망들은 붕붕거리며, 마치 아프리카에까지 다다를 것처럼 힘이 세다. 이 영화는 이러한 욕망들이 어떻게 내재성의 공동체를 만들고, 또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지를 정말 훌륭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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