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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철학, 또 하나의 세계 ― 푸코의 ‘한글 세계’

사람들은 외국 철학책에 대해 번역의 문제를 많이 지적한다. 번역의 질과 양 때문에 철학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 언어가 주는 뉘앙스의 문제까지 지적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나는 번역된 책들을 원래 한글로 쓰인 책처럼 접근해보자고 제안하곤 한다. 물론 원어가 가지는 고유한 음조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역사적 맥락이나 뉘앙스를 놓치고 있을 것이다. 한글로 읽으면 그런 즐거움과 핵심이 깎여 나가겠지만, 나는 그것을 원래 한글로 된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을 때 그 책이 내게 가르쳐주는 아주 다른 세계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

철학책에서 중요한 것은 한두 문장이 주는 결정적인 의미 해석이 아니라, 철학책 전체가 일관되게 나를 응시하며 던지고 있는 메시지와 그 메시지 속에 섞여 들어오는 몇 가지 빛나는 개념들이다. 우리는 이 책으로부터 무엇을 느꼈는가, 어떤 장면에서 내 마음이 파열되었는가가 중요하다. 나는 이 감응 체계가 번역의 질과 양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번역된 책은 이미 원서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이미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를테면 푸코의 번역서는 푸코의 ‘한글 세계’인 것이다. 설혹 번역에 문제가 많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 ‘오인’까지 포함하여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푸코의 『말과 사물』을 1980년대 번역본으로 먼저 읽었고, 다시 2010년대 새 번역본으로 꼼꼼히 읽었다. 그러나 이전 번역이든 이후 번역이든 나에게 핵심적으로 다가온 메시지와 개념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1950년대, 60년대, 70년대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서구 사상을 가지고 사유했을까? 결국 그들도 한글로 옮겨진, 어쩌면 이질적이고 불충분한 세계 속에서 서구 사상을 이해했고, 그것으로 세계를 구성했을 것이다. 먼 과거, 중국이나 일본이 근대에 외국책을 번역하며 이해했던 그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것을 아주 많이 왜곡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이질적인 동아시아를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지금은 바뀌었을까? 아니, 앞으로도 바뀔 수 있을까? 원어와 똑같은 한글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영원히 원어의 세계와 다른, 이질적이고 불충분한 세계에 살게 되지 않을까? 번역서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렇다. 다시 말해 원어의 정확한 번역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푸코의 ‘프랑스어 세계’는 아주 큰 성으로 존재하겠지만, 수많은 영주들을 거느리면서 서로 이질적인 언어의 성들을 함께 담고 있는 거대한 세계다. ‘한글 세계’는 그 가운데 하나이고, 우리는 그 성 안에서 거주하며 아주 다른 푸코를 바라볼 수도 있는 것이다. 원어를 고집하고 번역의 질과 양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남성들이 마초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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