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고유명을 가진 신체로 쓰기
나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글은 이제 더 이상 본받을 만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한 지 오래되었다. 이론적인 글을 쓰더라도, 그 안에 나의 신체적 체험이 녹아 있지 않고, 자기의 고유명을 가진 신체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글은 가능할지라도 내게는 전혀 감흥을 주지 못한다. 하다못해 나르시시즘이 노출될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써야만 나는 비로소 내 위장이 반응한다.
예전에 수유너머나 감이당에서 함께 공부하던 주부들이 자신의 체험을 자신이 읽은 책의 어떤 개념과 연결해 어떻게든 써 와 발표하며 울음을 터뜨리던 순간의 감각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나도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각성해 나간다고 느꼈기에, 그들을 당연히 동지로 여기며 그들에게서 배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식계나 글쟁이들에게서는 그런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우리 지식계는 자신의 치부와 나르시시즘을 모두 드러내며, 이론이든 체험이든 그것을 전개하는 글을 자신들의 학술적이거나 문학적인 글 아래에 두고 비웃으며 비평한다. 그리고 자신은 다르다는 제스처에만 열중한다. 그들은 소수성에 대해 쓸때도 자기 체험이 아니라, 타인으로서 소수자들의 체험을 취재 자원으로 삼아 글을 쓸 뿐이다.
요즘 나는, 어쩌면 자기 세계에 깊이 몰입하여 비판성과 우발성에 기대어 글을 썼던 조선시대 선비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미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박지원 같은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일상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유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글을, 편지든 잡문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써서 남겨 두었다. 대중은 평범한 직장인이든, 자영업자든, 노인이든, 주부든, 젊은이든, 저항하는 사람이든, 소수자든 누구든지 스스로 글을 써야 한다. 글쟁이들의 글에 감탄하지만 말고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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