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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신중한 괴물들: 작가의 일상과 글쓰기

파리 리뷰 인터뷰, 『작가란 무엇인가 1, 2, 3』

작가들이 자신들의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그들을 관찰하면, 그들은 매우 ‘필사적’이다. 마치 무언가 고갈되기 전에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야 한다는 애처로운 절박함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글을 써서 남길 시간이 더 이상 없을 것처럼, 삶을 걸고 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남겨 놓은 글이 세상에서 무엇에 쓸모가 있기에, 그렇게까지 글쓰기에 매달리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앨리스 먼로는 한때 남편과 함께 서점을 운영하며 집안일과 서점일을 병행하면서, 비어 있는 시간은 오로지 글쓰기로 채웠다(3-24). 그녀에게 글에 대한 설렘과 믿음이 고갈되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계속 쓰게 될 것은 분명했다. 보르헤스는 젊은 시절 사고를 당했을 때, “어쩌면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지 몰라”라고 절망했다. 글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64). 이처럼 글쓰기에 정신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은 대개 일상을 희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리언 반스가 말했듯이, 글은 여전히 일상적인 삶에 끊임없이 몸을 담그지 않고서는 생산되지 않는다(3-206). 작가들은 이런 일상을 글쓰기의 루틴으로 만들어 버티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이언 매큐언은 매일 아침 9시 30분까지 글을 쓰러 나가 하루에 최소 600단어 이상을 쓰려고 한다. 예순여덟 살의 나보코프는 여전히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색인 카드에 글을 쓴 뒤, 이를 차근차근 베껴 쓰고, 늘리고, 순서를 재배치하여 글을 완성한다. 그런 다음 공원 풀장에서 수영을 즐긴다(2-115). 줄리언 반스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1시 사이가 글을 쓰는 데 자신의 지적 능력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고쳐쓰기를 하거나 청구서 대금을 납부하는 등의 일상을 처리한다. 사실 그에게는 주말이야말로 글쓰기에 최적의 시간인데, 사람들이 모두 여행을 가서 자신도 그럴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반드시 글을 쓴다. 그에게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 되어버렸다(3-207).

앨리스 먼로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그녀는 매일 아침, 일주일에 7일을 글쓰기에 바치는데, 8시에 시작해 11시쯤 마무리한다. 늘 작업 할당량을 맞추려고 애쓴다. 만약 특정한 날에 외출해야 한다면, 빠지는 분량을 미리 써두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조이스 캐럴 오츠 같은 작가는 쓰고 수정하고 쓰고 수정하는 이 반복이 자신에게 아주 잘 맞는다는 감각마저 갖게 되어, ‘수정 작업과 사랑에 빠져서 소설 쓰기 자체를 포기할까’ 두렵기조차 하다(2-152).

그렇다고 일상에 파묻히는 일은 피한다. 오르한 파묵은 글을 쓰는 공간은 반드시 잠을 자거나 배우자와 공유하는 공간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세부적인 일들은 상상력을 죽이기 때문이다. 가정적이고 길들여진 하루 일과는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 곧 자기 안의 악마를 죽여버린다(1-72).

작가들은 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하다. 자신을 문장가라 여긴 트루먼 커포티는 콤마의 위치와 세미콜론의 비중에 집착할 정도로 꼼꼼했다. 초고는 연필로 쓰고, 이후 손으로 수정본을 옮겨 적었다. 문체에 집중하지 않는 비문장가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단지 타자를 치는 사람, 즉 타자수일 뿐이다. 어쩌면 문체는 자기 자신일지 모른다. 그래서 문체는 의식적으로 얻을 수 없다(3-76~78). 조이스 캐럴 오츠는 자신을 “질서 있고 주의 깊고 꼼꼼한 편이고 심하게 내성적”(2-256)이라고 묘사했는데, 이런 성격은 오츠만의 특성이 아니라 작가라는 존재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작가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소설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2-33).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기분’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오히려 글쓰기를 통해 기분을 창조해야 한다(2-151).

이런 굳건한 글쓰기-일상을 구축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작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에 거리를 두는 무심한 태도를 지닌 것 같다. 평론가들이란 작자들은 작가가 벌레처럼 쪼그라지길 원한다(3-115).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세계가 평론의 세계이니, 자신은 최선을 다해 작업을 할 뿐, 비평가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2-26). 커트 보네거트는 이렇게 일갈한다. “훌륭한 작가들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신뢰할 수 있는 독자들입니다.”(3-132) 그렇다. 작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비평가의 비평이 아니라, 자신을 읽어줄 신뢰할 만한 독자들이다.

이번에 작가들의 입을 통해 글쓰기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을 맴돈 작가에 대한 규정은, 그들이 “매우 신중한 괴물들”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의 일상을 버리고, 매우 신중하고 정밀하게 부지런히 다름을 추구하는 일상의 괴물들. 이 신중하고 정밀하고 부지런한 괴물들은 아침에 일어나 언어로 어떻게 자신을 다르게 만들지를 상상하며 끊임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또 낭비한다. 글이 삶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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