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랑·정치: 러셀의 삶을 관통한 혼돈과 질서
버트런드 러셀, 『자서전』

우리는 늘 어떤 대상에 매혹을 느끼고 그것에 깊이 빠지게 되지만, 이성과 욕망은 그 밑바닥을 보고 다시 빠져나와 다른 길을 향하게 한다. 이 무한한 매혹과 중독 속에서도 우리는 마치 공무공이 벽을 치고 나오듯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러셀의 삶은 이러한 매혹과 중독, 그리고 또 다른 이성과 욕망을 품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거듭한 정신적 궤적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중독적 상태를 다른 이성과 다른 욕망으로 경계하며 살아갔다.
러셀 자서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그가 수학에 매혹을 느끼는 순간이다. 열한 살 무렵, 형에게서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러셀은 그것을 첫사랑에 비유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세상에 그처럼 감미로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부터 내 나이 서른여덟에 화이트헤드와 함께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수학원리』)를 완성하기까지, 수학은 나의 주요 관심사이자 행복의 주 원천이었다.”(상 53, 54) 그러나 그때 이미 러셀은 수학에 대한 작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학이 공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형에게 공리에 대해 합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고집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그가 느꼈던 수학의 전제들에 대한 의혹은 이후에도 이어졌고, 결국 훗날 그의 작업 방향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의 공저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는 수학적 사고의 본성을 가장 잘 드러낸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핵심은 수학이 진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타당성(validity)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진리와 거짓은 사실을 다루는 명제의 성질이지만, 타당성 혹은 비타당성은 한 형식적 명제가 다른 형식적 명제와 맺는 필연적 논리 관계를 정확하게 혹은 부정확하게 서술하는 명제의 성질이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수학은 아프리오리한 진리에 관심을 두는 것이지, 사실의 진위 여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수학은 정의·공리·규칙을 먼저 정하고, 그 안에서 기호들의 조합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지 여부를 판단한다.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의 목표는 산술과 해석학을 비롯한 수학 전체를 논리적 공리와 추론 규칙으로부터 형식적으로 도출해 보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수학=논리”라는 로지시즘(logicism)을 증명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1+1=2”를 증명하는 데조차 수백 쪽의 논리 전개가 필요할 수 있었다. 이는 현실에서 사과 하나와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정의와 공리로부터 그것이 필연적으로 도출됨을 보이려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내가 보기에 자연과학자는 팩트-체커(fact-checker)이고, 수학자는 증명-체커(proof-checker)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러셀이 이성적 지식(수학)에 깊이 매혹되었으나, 동시에 “공리는 근거가 없지 않은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또 다른 이성과 욕망에 이끌려 사유의 새로운 방향을 탐색했다고 말하고 싶다.
러셀의 삶에서 또 하나 중요한 장면은 그의 여성관과 연애 편력이다.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그는 할머니와 하인들 곁에서 자랐다. 집안 분위기는 청교도적이면서도 동시에 기묘하게 자유주의적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 속에는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의 기운도 있었다. 수학에 도취되던 시기,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하녀를 꾀어 키스와 포옹을 했다고 고백한다(그러나 하룻밤을 보내지는 못했다고 밝힌다). 이후 그는 점차 병적으로 자신을 죄책감 속에서 바라보았고, 스스로를 매우 나쁜 인간이라고 여겼다. 그는 네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 앨리스와는 성격 차이로, 두 번째 아내 페미니스트 도라와는 자유연애 실험의 실패로, 세 번째 아내 패트리샤와는 연령 차이 속 불화로 갈라섰다. 그러나 네 번째 아내 이디스와는 노년의 안정된 삶을 함께한다. 그는 결혼 외에도 수많은 연애와 불륜으로 유명했으며, 스스로를 “사랑에 중독된 사람”이라 표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병적인 상태가 심화될수록 그는 더욱 강렬한 이상주의적 감정에 사로잡혔다. 일몰과 구름의 아름다움, 봄가을의 나무와 들꽃에서 큰 흥미를 느꼈고, 밀턴, 바이런, 셰익스피어, 테니슨 같은 시인들의 시를 열광적으로 읽었다. 급기야 종교와 철학에 깊은 관심을 품게 되었고, 혼자 이탈리아어를 독학하여 단테와 마키아벨리도 읽었다.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 경제학』과 『논리학』을 깊이 탐독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그에게 “과학의 명제에서 요구되는 것과 같은 유의미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 한 신학적 명제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심어주었다. 그는 성적 탐닉의 길에 들어서면, 동시에 어떤 성스러운 욕망이 고개를 들곤 했다고 할 수 있다. 집안 분위기처럼 무정부주의적 상태로 떨어지면, 한편으로는 청교도적 규율 같은 이성이 그를 잠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 사고가 그를 다시 다른 길로 추동했다. 다시 말해, 개인적 욕망의 혼돈과 이성적·윤리적 추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 속에 있었고, 바로 그것이 그의 철학적 생산력의 원천이 된 것 같다.
이런 태도는 정치철학을 표출할 때도 똑같이 반복된다. 개인의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는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한다. 징병제, 검열, 사상 탄압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가 축소된다. 따라서 국가 권력이 무제한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러셀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사회적 응집과 권위가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음을 인정했다. 문제는 개인의 창조성과 자유를 억누르지 않으면서 사회적 응집을 유지하는 균형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러셀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국가 하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어떤 국가가 강대국이나 국가 집단과 맞서면 스스로 방어할 수 없다. 핵무기와 같은 신무기 때문에 국가 간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개별 국가의 안전은 더 이상 자체적으로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국가 위에 국제적 권위, 즉 세계 정부가 필요하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불변하는 원리와 엄격한 추론 체계를 통해 질서를 세우려 한 그의 수학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국가 권력은 위험하고 불완전하지만, 자유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계 정부라는 더 큰 질서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수학에서 공리와 규칙 위에 타당한 체계를 세우듯, 정치에서도 국제적 제도와 개인적 양심을 결합해 균형을 잡으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에겐 국제적 제도와 개인적 양심이 수학에 보았던 그 공리이자 규칙이다.
러셀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혼돈과 질서의 이중 구조를 지켜본다. 수학에서는 공리적 체계와 의혹 사이에서, 연애에서는 욕망과 이상주의 사이에서, 정치철학에서는 국가 권력의 필요성과 자유 억압의 위험 사이에서, 그는 언제나 한쪽에만 빠지지 않고 모순된 두 요소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사유를 전개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말하지만, 그의 철학은 매혹과 중독 속에서 다시 빠져나오려는 이성적 노력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것이 성공적이었느냐는 논외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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