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성역을 나가다
오즈 야스지로, 『만춘』


『만춘』 초반에 슈키치와 제자가 나누는 대화 속에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이름이 언급된다. 얼핏 영화와 무관해 보이지만, 이는 의미심장하다. 리스트는 자유무역이 모든 나라에 똑같이 유익하지 않다고 보고, 특히 후발국이 그대로 시장에 뛰어들면 자국 산업이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보호 정책을 통해 산업 기반을 다진 뒤 경쟁력이 갖춰졌을 때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는 유치산업 보호론을 내세운다.
슈키치는 홀아비 교수다. 20대 중반인 노리코는 출가하지 않은 딸로서 아버지를 위해 살림을 한다. 고모는 오빠와 딸 사이를 오가며 신랑감을 찾아 노리코를 둥지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딸은 그럴 생각이 없다. 슈키치는 아버지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마지못해 딸을 시집보내는 데 동조한다. 사실 그 자신도 딸과 떨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딸이 계속 반대하자, 슈키치는 자신도 재혼할 계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래야 딸이 단념하고 결혼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은 결혼 적령기를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슈키치 교수와 딸 노리코의 관계는 오즈 야스지로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경제 논리의 은유처럼 읽을 수 있다. 노리코는 이미 나이가 찼지만 여전히 아버지 곁에서 ‘보호’받는 삶을 산다. 슈키치는 딸이 독립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을 알지만, 본심으로는 딸을 곁에 두고 싶다. 결국 그는 딸이 떠날 수밖에 없도록 거짓말까지 동원한다. 리스트 식으로 말하면, 슈키치는 딸을 계속 보호막 안에 두고 싶지만 사회는 이제 “자유무역”(즉, 결혼과 독립)을 요구한다. 슈키치의 입장은 리스트의 논리와 겹친다. 그는 딸을 더 보호하고 싶지만, 그 상태가 영원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리스트가 말했듯 보호는 일시적일 뿐, 언젠가는 개방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환은 늘 고통스럽다. 고모가 결혼을 권유하는 장면에서 아버지와 딸이 당황스러워하는 것도 바로 그 전환의 고통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핵심적인 장면은 이 서사 이후에 전개된다. 영화 중반에 아버지와 딸이 함께 보는 공연은 노(能) 공연이고, 그 제목은 「카키츠바타(붓꽃)」이다. 이 공연의 줄거리는 이렇다. 여행 중인 한 승려가 붓꽃으로 유명한 미카와 지방에 도착한다. 그는 꽃을 보며 “집에 아내가 있기에 이 여행이 더욱 그립다”는 와카를 읊는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붓꽃의 아름다움도 결국 덧없다고 말하며, 인간의 감정 또한 무상함을 깨닫게 한다. 이런 공연이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을 때, 노리코는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재혼을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을 느낀다. 즉,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변화, 아버지-딸 관계의 균열 가능성이 표면화된 것이다. 이 충격이 노리코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노 공연 속 승려처럼, 아버지가 떠날 것이라는 가능성이 그녀의 가슴을 깊이 후벼 판다.
마지막 부분에서 아버지와 딸이 마지막 여행으로 간 교토 여관의 항아리 장면은 더욱 강렬하다. 정지 화면처럼 장지의 달 그림자와 항아리, 그리고 기둥이 나오는 장면은 그것 자체로 아버지의 형상이다. 노리코는 그제야 성역처럼 존재했던 아버지의 집이 품고 있던 모든 가능성을 깨닫는다. 그 성역은 무엇이든 가능했던 영역이다. 어쩌면 하스미 시게히코가 이 장면을 두고 상상했던 근친상간조차 가능했던 은밀한 지대일 수 있다. 로저 애버트는 하스미의 해석이 다소 무리라고 보지만, 나는 하스미의 해석이 매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성역 안에서는 무슨 일이든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경제적 은유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자유주의적 세계무역 속에서, 은밀하고 기이한 세계로서의 성역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 성역을 벗어나면서 괴로운 감정을 우리는 「카키츠바타」의 여인의 말처럼 결국 덧없다는 말로 은근 슬쩍 감추며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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