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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시험이나 발표를 앞두고 불안이 가중되며 불행감이 극대화되곤 했다. 그때는 이런 불안과 불행감이 너무 괴롭고 무서웠다. 실제로 불안과 불행감 때문에 온종일 안절부절하다가 시험이나 발표 시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중대한 결정이나 발표를 앞두면 똑같은 불안과 불행감이 찾아와 밤새 괴롭고 공포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나이가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과 불행감이 없다면 만족과 행복감도 없지 않을까? 사회적 삶에서는 적절한 긴장 속에서 불안과 불행감을 불러일으키는 압력—정치학적으로나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이를 ‘억압’이라고 불러왔을 것이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오히려 자유와 행복을 위해 압력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압력이 없으면 오히려 스스로 적절한 압력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견디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술이다. 시험을 위해 기한 내에 일정한 분량을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는 압박, 대회 참석을 위해 기한 내에 육체적 역량을 끌어올려야 하는 훈련 등이 바로 그런 압력의 생성이다.

이 압력과 긴장의 훈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곧 창피, 모멸, 죄책감 같은 정서라고 본다면, 그것들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이미 생을 추동하는 힘으로부터 생성되는, 생물학적 전략으로서의 정서이다. 살기 위해서, 아니 더 잘 살기 위해 우리는 불안하고 불행한 것이다.

이런 압력은 생물학적으로도 신체적·인지적 가소성(plasticity)을 촉발한다고 한다. 운동선수의 경우 반복된 긴장과 훈련 속에서 근육이 강화되며, 시험 준비 과정에서는 장기 기억의 반복적 형성을 통해 뇌의 신경회로 역시 시냅스 연결이 강화된다. 즉, 불안과 압력은 단순히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경생물학적 변화를 촉진한다. 외부 조건의 압박이 정서를 일으키고, 그 정서의 반복이 신경생물학적 변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서(불안과 불행감)가 육체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내며 궁극적으로는 행복감 같은 긍정적 정서로 이어진다는 역설이다.

스피노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주침(encounter)은 신체 능력을 증대시키면 ‘기쁨(laetitia)’을, 감소시키면 ‘슬픔(tristitia)’을 낳는다. 이를 신경과학적 언어로 옮기면, 적절한 압박은 신경가소성을 촉진하여 학습과 성장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능력의 증대’라는 긍정적 마주침이다. 반대로 압박이 과도해 해마 위축이나 만성 불안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능력의 감소’라는 부정적 마주침이 된다.

스피노자나 질 들뢰즈의 관점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실체를 다른 두 속성으로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불안이나 불행감 같은 정서는 ‘정신의 표상’이자 동시에 ‘신체의 상태’이다. 예컨대 불안은 편도체의 활성, 아드레날린 분비, 심장박동 가속이라는 신체적 사건이자, 위협을 상상하거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정신적 사건이다. 둘은 서로 다른 차원의 현상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변화를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외부 사물과의 마주침으로 발생한 신체 변형이 정서이고, 그 변형이 능력 감소로 이어지면 슬픔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된다. 불안과 불행감은 이 슬픔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정서도 적절한 긴장으로서 훈련을 거치면 긍정적 신체 변화를 일으킨다. 정서는 신체 감소 상태의 정신적 표상이지만, 역설적으로 적절한 감소가 다시 신체 능력의 증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신체 감소가 신체 증대를 일으킨다는 이 논리는 매우 기이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정서는 외부와의 접촉에서 생겨나지만, 그 마주침이 지속적으로 재조직될 경우 정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은 정서를 이해를 통해 재배열할 수 있다. 『에티카』 5부 전반부의 요지는 우리가 정서를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조절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이다. 어쩌면 압력과 긴장을 훈련함으로써 정서를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조절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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