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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 엘링턴, 『Ellington at Newport』(1956), “Diminuendo and Crescendo in Blue”

듀크 엘링턴의 작곡 과정은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빌리 스트레이혼이나 밴드 멤버 중 한 명이 찾아와 테마를 알려주면, 그는 피아노에 앉아 그 테마를 연주해본다. 그러면 그 연주를 듣던 밴드의 리듬 섹션이 리듬을 얹어 본다. 이어서 관악 파트는 피아노와 리듬 위에 올라타서 연주를 시작한다. 어떤 멤버라도 그 과정에 뛰어들어 즉흥연주를 펼치고, 그 즉흥이 곡에 영향을 끼치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곡은 변형되어 간다. 사람들은 이것을 ‘집단 창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그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엘링턴의 특이성을 ‘집단’이라는 말로 다소 은폐해버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엘링턴의 작곡 과정 그 자체가 즉흥연주, 곧 임프로바이즈라고 말하고 싶다. 애초에 작곡이라는 표현 자체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작곡한다’는 정체성 자체가 없었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연주 그 자체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치 무계획적으로 흘러가다가, 누군가가 나타나 테마를 던지면 그 순간 출발하여 여러 사람이 즉흥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음계열의 실험이 시도되다가 어느 순간 참여자들의 마음과 신체 간 움직임이 일치하면서 작품의 음계열이 생성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말한 리좀적 생성이야말로 엘링턴의 음악에서 실현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Diminuendo and Crescendo in Blue”. 디미누엔도는 점점 작아짐, 서서히 약해짐이다. 크레셴도는 점점 커짐, 서서히 강해짐이다. 결국 이것을 직역하면, 블루스 속에서 점점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고조되는 곡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Diminuendo in Blue” 구간에서는 점점 줄어드는 듯한 리프와 섹션의 응집이 보이다가, 솔로 구간에 이르면 폴 곤살베스가 단순 블루스 코드 위에서 점차 긴장과 변화를 누적시키며 군중을 광란으로 몰아간다. 리듬 섹션은 일정한 펄스를 유지해 그 긴장을 끌어올린다. “Crescendo in Blue”에 이르면 다시 전체 밴드가 합류해 폭발적으로 마무리한다. 재즈사에서 이 장면은 전설적인 순간이다. 곤살베스의 솔로는 즉흥연주의 힘이 군중을 집단적 트랜스로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엘링턴은 즉흥성과 구성력을 절묘하게 배치해 혼돈과 질서를 동시에 체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모습이 엘링턴에게 특별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 연습과 작곡의 과정 자체를 이런 행위예술의 연속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연주가 먼저 흐르고, 그 흔적으로서 악보와 연주의 사진이 남을 뿐이었다. 이는 마치 삶이 먼저 있고 그 흔적이 문화로 남겨지는 것과 같다. 문화가 있어서 삶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즉흥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단지 그 흔적이 문화로 뒤에 남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링턴 같은 사람들에게는 ‘연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연습이 곧 연주이기 때문이다. 삶이 끊임없이 흘러가듯, 연주도 매번 실황처럼 실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이런 과정에도 밴드 멤버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즉, 오케스트라가 먼저 있었던 것이다. 서로 몸과 마음을 맞출 수 있는 멤버들이 말이다. 다시 말해,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곧 디스포지티프이다. 그 이후 연주와 연출이 뒤따를 수 있었다. 만약 애초에 그런 연주자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저런 리좀적인 공동 창작은 실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피아니스트, 트럼펫터, 드러머 등 각자가 원래 맡고 있던 역할도 존재했다. 즉 현상적으로는 각 연주자가 자기 악기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가 시작되면 각각의 악기는 기존의 정체성을 넘어 즉흥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공동 존재를 만들어냈다. 그 순간 악기들은 단순히 개별 악기가 아니라,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악기로 재탄생한 것이다. “Diminuendo and Crescendo in Blue”에서 곤살베스의 색소폰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색소폰은 오케스트레이션되는 순간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재즈의 디스포지티프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는 연주자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적 물질 기초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연주자들 사이에 흐르는 의욕과 기대라는 믿음의 물질 기초이다. 공동체와 믿음, 이 두 가지가 핵심이다. 엘링턴의 리더십은 바로 이 공동체와 믿음이라는 디스포지티프를 어떻게 유리하게 움직이게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언젠가 앨리스 먼로가 “설렘과 믿음이 없다면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던 것과 같다. 엘링턴의 리더십은 연주자들로 하여금 설렘과 믿음을 일으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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