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라이트, 《어톤먼트》(2008)

조 라이트 감독이 《어톤먼트》를 찍기 위해 키이라 나이틀리를 다시 불렀을 때, 그가 처음 점찍어 놓았던 역은 세실리아가 아니라 브라이어니였다고 한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를 보면 세실리아가 키이라 나이틀리가 아니었다면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또한 감독은 로비의 캐릭터를 ‘낙천주의의 눈망울’을 지닌 인물로 구상했다. 나는 훗날 《23 아이덴티티》에 출연한 제임스 맥어보이만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잠시 그의 순수한 눈망울을 오해하며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다시 되돌려 맥어보이의 눈망울만을 찾아보면, 상처받은 순결한 눈망울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감독은 배우를 매우 현명하게 캐스팅한 것이다.
내가 영화적으로 가장 눈여겨본 장면은 로비가 프랑스 뎅케르크 해변에 도착해 철수선을 기다리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로비를 따라 해변을 한 바퀴 도는데, 그곳에는 수천 명의 병사들이 넋이 나간 채 널브러져 있거나,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며 불안을 달래거나, 데려가지 못할 말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있다. 이런 병사들 곁에는 여러 구조물들이 추상화처럼 그로테스크하게 파괴된 채 서 있다. 인간 자체의 비극적 혼돈과 절망 속에서 개인의 비극은 그것과 놀랍게도 닮아 있다. 로비의 개인적 비극은 인간 조건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 거대한 미장센은 로비의 비극을 인간 조건의 비극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같은 뎅케르크 사건을 압도적인 체험적 스릴러로 재현한 적이 있다. 놀란은 대규모 롱테이크 대신 짧고 강렬한 컷을 활용하고, 한스 짐머의 시계 초침음을 이용한 사운드로 시간적 긴장을 압축한다. 그의 영화는 정치적 담론이나 인간 비극의 서사를 최소화하고, 순수한 생존의 감각만을 관객에게 이식하려 한다. 말하자면 놀란의 영화는 서사를 모두 제거한 작품이다.
반면 《어톤먼트》에서 뎅케르크의 미장센은 주인공 로비의 ‘삶과 사랑이 무너지는 지점’을 시각화하는 장치다. 다시 말해, 뎅케르크는 개인적 비극과 동시에 인간 조건의 비극을 비추는 미장센으로 전유된다. 여기서 개인의 비극은 단지 개인적 서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 자체가 비극적 조건 속에서 침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장센은 개인의 비극을 인간 조건의 비극 속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분명히 해낸다.
《어톤먼트》의 서사는 단일한 잘못, 즉 브라이어니의 거짓 증언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끊임없이 확대되는 비극의 연쇄로 이어진다. 로비는 부당하게 감옥에 갇히고 결국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다. 세실리아는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브라이어니는 작가로서 평생 이 사건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즉, 한 번의 잘못이 계속 누적되면서 새로운 비극들이 겹겹이 덧씌워지는 것이다. 이때 ‘중첩’은 단순히 사건이 꼬였다는 뜻이 아니라, 비극의 구조가 언제나 반복되고 증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증식되는 비극들 아래서 단순히 속죄라는 행위는 목표를 완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뎅케르크의 미장센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거대한 벽화처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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