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포지티프와 미장센: 인간을 넘어선 영화적 세계
에이드리언 마틴, 『미장센과 영화 스타일』

영화는 다른 예술과 다른 것인가. 나에게 관심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이 책은 내 질문에 대한 하나의 훌륭한 대답을 보여준다.
미장센은 원래 “무대 위에 배치하다”라는 뜻에서 출발한 연극 용어이다. 영화에서 이 개념은 확장되어, 배우의 연기와 위치, 카메라 구도, 조명, 소품, 배경, 사운드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쇼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시각적 연출의 총합을 뜻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비평은 이를 “이야기를 시각화하고 감정과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해해 왔다. 《기생충》에서 계단과 수직 이동이 계급 구조를 시각화한다는 해석이나, 《덩케르크》에서 폭탄이 차례로 떨어지는 장면이 절망과 공포를 관객에게 직접 체험하게 한다는 평가는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영화가 단지 “텍스트보다 더 강렬하게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옹호된다면, 결국 영화는 소설이나 연극과 같은 다른 예술 형식과 단지 표현 강도의 차이로만 구별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독자적인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각의 관점에서 보면, 영화는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유를 가능하게 했던 독특한 매체였다. 이를테면 《기생충》의 긴 계단을 따라 빗물이 흘러내리고 가족이 내려가는 장면은 반드시 계급적 상상력만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중세의 성에 있을 법한 가느다란 뒷문을 보여주는 듯했고, 나는 순간 여기가 바로 중세라고 생각했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현대가 서구 유럽의 중세와 다르지 않다는 감각을 받았지, 처음부터 계급 문제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계급이 무너지는 것이구나 하는, 반계급적 전복의 가능성을 더 강하게 느꼈다.
《덩케르크》의 폭탄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절망과 공포를 보여주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영화’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절망과 공포가 전혀 불러일으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이 살아남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게임적 폭력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는지 더 잘 드러나 보였다. 다시 말해 그것은 게임적인 미장센이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미장센은 전혀 다른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영화적 표현의 고유한 의의는 단지 의미를 잘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미장센은 표현이 먼저 있고, 그 표현으로부터 다층적인 의미가 생성되거나, 심지어 의미가 무화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미장센의 가치는 “의미를 옮겨 담는 그릇”이 아니라, 표현 자체가 의미의 장을 열어젖히는 사건에 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서 류성희 미술감독은 《올드보이》 속 유지태가 사는 방의 물 웅덩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실은 돈이 없어서… 이게 시나리오에는 상위 1%들이 사는 펜트하우스인 거예요. 우리가 예산이 넉넉했으면 굉장히 좋은 가구들을 모으고, 하나하나 다 좋은 걸 갖다가 놨을 거예요. 근데 예산이 그렇게 충분하지가 않으니까.. 이걸로 어떻게 사람들을 믿게끔 할 것인가 그러니까 차라리 일반적으로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냥 낯설게 만들어야겠다, 그냥 그래서 쟤는 저러려니, 하고 생각하게, 그냥 그런 식으로 하는 거 밖에는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어서 감독이 이 설치를 보고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데 재미있는게 제가 엉뚱한 펜트하우스 디자인을 가져갔을 때 아마 감독 10명 중에 9명은 이게 뭐니 그래서 여기 수로가 어떻게 있을 수가 있니, 라고 할텐데, 박감독님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한참 생각하시다가 그러면 우진이 여기다 손을 씻게 해야 되겠다. 액션 신을 여기서 그냥 해야 되겠다, 그러시더라.”
이 대답은 미장센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미장센을 시나리오와 콘티가 먼저 있고,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한 수단들의 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례는 정반대이다. 예산 부족 때문에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장치와 배치 자체가 새로운 행동과 서사를 이끌어낸다. 즉 미장센은 단순히 서사를 시각화하는 수단이 아니라, 때로는 우연히 주어진 공간적 조건 그 자체가 서사와 화면 흐름을 만들어내는 힘을 지닌다.
나는 이 예가 무대 밖의 조건까지도 담고 있다고 본다. 미장센의 영역을 더 확대해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화면 프레임에 잡히는 쇼트를 넘어서서, 영화라는 행위가 담겨 있는 조건들의 배치까지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유지태가 사는 방의 물 웅덩이는 영화에 스며든 자본의 조건을 드러낸다. 그리고 감독이 행위와 서사를 다시 구성하는 것은, 그 장치에 따른 주체의 반응을 미장센이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에이드리언 마틴은 이런 미장센의 모습을 ‘디스포지티프’라는 개념으로 포괄한다. 디스포지티프는 간단히 말해 규칙이 있는 장치이자 배열이다.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 창작을 실행하면 결과가 나오고, 그 과정에서 종종 예기치 않은 산물이 생긴다. 여기서 규칙은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니라 발상을 밀어붙이는 엔진이 된다. 푸코가 말하듯 이 장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묶어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연계를 만들고, 아감벤이 말하듯 몸짓과 행동을 포착하고 방향을 정해 주는 힘을 가진다. 그래서 디스포지티프는 영화의 구조이면서 동시에 게임 같은 실험이며, 결과는 때로 ‘미친 기계’처럼 예상을 벗어난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10》은 차량 내부에 카메라를 고정해 배우의 즉흥 대화를 자동 기록하게 만드는 장치로 전통적 미장센을 대체했다. “감독이 의미를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규칙과 배열이라는 장치가 창작과 감상의 방식을 조직하고, 그 과정 자체가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에메랄드》는 호텔 공간, 들려오는 대화, 디지털 이미지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공명하는 작업이다. 관객은 이 단편적 요소들을 모아 서사를 만들 수도 있고, 그냥 그 속을 부유할 수도 있다. 배우와 인물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장소와 사물, 그리고 흔적들뿐이다. 대신 먼지와 빛 같은 비인격적 힘이 화면을 채우며, 카메라의 움직임조차 점차 인간의 손길을 잃어가며 마치 세계 자체가 스스로를 탐험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여기서 미장센은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장치, 즉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감각적 입자와 흐름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힘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인 것이 무화되고, 동시에 인간적인 의미들이 사라지고, 궁극적으로 존재가 드러나게 하는 힘이 된다. 미장센은 장치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틴은 이 장면들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분열들, 굴절들, 단독자들, 복합자들이 준동한다. 아피찻퐁은 창작환경이 제공하는 모든 기회를 통해 자신의 시적 세계의 요소들을 더 멀리 흩뿌리며 분산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시적 요소들을 더욱 강화한다. <에메랄드>라는 디스포지티프의 중심에 위치한 조명 장치는, 화면에 드러난 색채 스펙트럼을 한편으로는 집중시키고, 동시에 또 다른 공간, 즉 관람자의 실제 공간으로 그것을 분산시킨다. 우리는 황홀한 존재, 존귀한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가장 평범한 물질이다. 입자, 먼지, 끝없이 형성되고, 망가졌다 재형성되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 결국 그것이 <에메랄드>의 진정한 드라마다.”(386~387쪽)
결국 에이드리언 마틴은 미장센이라는 스타일을 통해 영화가 인간을 넘어서는 드라마를 어떻게 보여주는지를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미장센을 통해 다른 예술 수단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비인간의 세계를 표현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