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통찰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해방감을 준다. 일반적으로 ‘의미 없음’은 공허함이나 절망으로 이해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통찰에 따를 때,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이나 목적을 상실한 존재 상태도 더 이상 결핍이 아니다. 물론 통념의 세계에서 무의미는 먼저 불안을 유발한다. 그러므로 그 불안을 감내하고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니체식으로 말하면, 니힐리즘을 통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통과 과정에서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 ‘의미’는 군집 개미의 생존을 위해 필요했던 땅구멍과도 같았지만, 그것이 없으면 몰살이 불가피하다. 개미가 개미로서의 존재를 벗어나려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의미를 소유하지 못한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미의 부재가 상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의미 자체가 없었다면 상실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무의미의 인식은 인간 존재에게 어떤 강박에서도 벗어난 자유를 허락한다. 우리는 더 이상 삶을 해석하고 정당화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단지 주어진 순간의 감각과 경험에 몰두할 수 있다. 목적이나 종착지 없이도 순간적인 기쁨에 삶을 걸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순간이 적극적 니힐리즘으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지점일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에서 그는 인간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무의미와 공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 무의미를 슬픔이나 절망으로만 처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 속에서 언어를 최소화하고, 의미를 제거해 나감으로써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의 유명한 문장 “Fail again. Fail better”는 목적의 도달이 아닌, 반복과 실패 자체를 삶의 방식으로 긍정하는 선언처럼 읽힌다.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차이’는 ‘새로운 생성’과 연결된다. 결국 이 반복은 결과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진행되며, 그 자체로 미세한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펼칠 잠재력을 품는다.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여전히 행위하고 말하며 살아간다. 그러한 반복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결핍이 아닌, 해방된 존재로서의 ‘존재’를 살아갈 수 있다. 무의미는 끝이 아니라 강박 없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반복은 차이가 되고, 실패는 다시 반복할 힘을 주는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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