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비평과 도래할 사유
<더 라스트 오브 어스> 같은 좀비 드라마(일반적으로 좀비는 죽은 자가 되살아나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감염자들을 좀비라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비슷하게 움직이니 그렇게 부르자)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좀비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아마 드라마 자체가 그런 보호 과정에서 오는 스릴에 떡밥이 있기 때문에,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스릴을 좇으며 몰입하게 되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이런 장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좀비는 흔하고 인간은 드문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더욱이 인간은 수많은 좀비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은밀한 곳, 더 후미진 곳에 숨어 살며, 드러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워킹데드> 같은 드라마의 후반 시즌에 이르면 수천, 수만 명의 좀비가 떼 지어 몰려다니는 장면이 흔한데, 그쯤 되면 인간은 아주 희귀하고 은폐되어, 어떤 장면이나 에피소드에서는 인간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자 우리는 좀비들 속에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인간, 거의 비인간을 보게 된다.

여기서 나는 이 은폐된 인간들에게서 비인간적인 진리의 냄새를 맡는다. 만약 비평가들이 어떤 철학자의 글에 대한 주석자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해석을 비판적으로 보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래서 그 해석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수행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단지 그 해석을 거부하려는 데 그친다면, 그 행위는 그 비판자에게 아무런 소득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기껏해야, 그 거부 이후 이어질 자신의 주장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해석이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며, 절대적으로 원래의 의도에 적중한다는 가상만 강화될 뿐이다.
우리는 다만 철학자의 글을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그 철학자의 로고스에 더 가까이 머무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의 사유가, 아직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은 로고스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끄는 데 기여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과거 철학자의 글을 해석하는 일은 그 해석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도래할 사유에 기여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노력은 이전 사상가와의 대화를 통해 사유되어야 할 것의 영역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집중되어야 하며, 비판 그 자체에만 몰두해서는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아무런 소득이 없다. 우리는 어쩌면 아무런 소득이 없는 비판만 가득한 세계에 있지는 않은가.
통찰력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해석하려는 철학자에 대한 해석이 각각의 현대 주석자나 철학자에게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 다양한 해석들을 단지 역사학적으로만 검토한다면, 그러니까 과거의 K 철학자에 대해 A는 이렇게, B는 저렇게, C는 또 다르게 해석했다고 정리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러한 다양한 해석들을 모두 올바른 것으로 선언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다양성으로 인해, 자신이 상대주의라는 유령에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는 필연적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해석들을 단지 역사적으로만 다루기 때문이다. 곧 누가 어떻게 말했다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과거의 철학자와 물음을 주고받는 대화가 이미 중단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이러한 비판들이 좀비들의 시선과 똑같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좀비 영화에서는, 주인공-인간이 그 좁은 공간에서, 좀비가 눈치 챌 수도 있는 수많은 흔적에도 불구하고, 매번 자신의 머리와 몸을 숨긴 채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아마도 좀비들은 주인공의 진정한 존재에 결코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 영화는 은폐의 영화다. 주인공-인간은 항상 자신을 은폐한다. 마치 진리처럼. 해석하려는 철학자의 글에서 존재의 울림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비평가들은 좀비와도 같다. 좀비는 살아 있으나 실은 죽어 있는 자, 즉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는 껍데기다. 좀비는 드러난 흔적만을 추적한다. 이는 곧 드러난 해석, 누가 뭐라고 말했는지, 해석의 역사만을 좇는 학문적 태도와도 같다. 좀비는 단지 드러난 흔적만을 좇아 다른 곳으로 향한다. 존재자로 드러난 것들만 잡아먹으면서. 우리의 좀비-비평가들 역시, 비판을 통해 존재자들만 물고 뜯고는 곧 다른 곳으로 떠난다. 좀비가 드러난 해석과 기록만을 좇는 것은, 철학자와의 대화를 포기한 채 표면적인 다양성만을 집계하는 주석가들과 다르지 않다. 철학자의 존재에 참여하지 않은 채, 드러난 해석만을 소비하고 떠나는 비평적 태도야말로 우리 시대 학문의 병이다.
사실, 우리가 해석하려는 철학자들이 시대마다, 주석가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 철학자 자신조차도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관점의 범위 안에서만 말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그 철학자가 그만큼 풍성하고 충만한 사유의 세계를 지니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징표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가, 그 철학자가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할 수 없었던, 의도하지 않게 은폐되어 있었던 진리가 여전히 충만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해석하려는 철학자에 대해 ‘객관적으로 올바른 학설’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 사유에 엄습해 오는 유익한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회피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해석하려는 철학자에 대한 해석이 우리에게 어떤 확정적인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반드시 실패한 해석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그리고 그것을 읽는 누군가에게 존재의 사건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비평가 주체가 아니라, 도래할 사유에 복종하는 해석, 그리고 그것이 일으키는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해석. 그래야만 우리는 좀비가 되는 것을 막고, 진리를 보호하며,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인간—내가 보기에, 이 순간에서야 우리는 좀비적 인간 정념에서 벗어난 비인간의 인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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