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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에 잠시 빠져 지낸다. 그런 동안에는 대통령 선거에도 자연스레 관심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의 글 속, 변두리에 소소하게 숨어 있는 문장도 내 방식대로, 마구잡이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소소한 문장을 바람삼아 마구 글을 써나가고도 싶은데 그럴 여유는 없다. 한 단락씩 메모처럼 써두었다가 얼기설기 붙여보았다. 그렇게 해서 보니, 처음 책 읽을 때 자주 쓰곤 했던 ‘씨앗문장’ 쓰기 같은 게 되었다. 이만교 선생님 책에서 봤던거 같은데….

“형이상학의 종언에 대한 예감에 근거해 우리가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낱 망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극복된 형이상학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변화된 형태로 되돌아와, 존재자에 대한 존재의 구별로서 지속적으로 위세를 떨치며 계속 지배한다. 존재자의 진리의 몰락이 의미하는 것은, 존재자의 개방성(Offenbarkeit), 그리고 존재자만의 개방성이 더 이상 자신만이 척도가 되겠다고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존재자(Seiendes)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예를 들어 책상, 나무, 별, 스마트폰, 데이터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들이다. 존재(Sein)는 이러한 ‘존재자들’이 존재하게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조건, 즉 바탕이다. 존재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가능케 하는 그 무엇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하이데거는 우리가 철학을 해오면서 ‘존재자’들만을 바라보며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곧 존재에 대해 묻는 일을 잊었다고 말한다. 이른바 “존재 망각”

그렇다면 여기서 ‘존재자의 개방성(Offenbarkeit)’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Offenbarkeit는 독일어 “Offen” (열린)에서 파생된 말이다. ‘개방성’이란 무언가가 드러날 수 있는 상태(열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존재자의 개방성이란, 내식대로 해석하자면, “존재자들이 우리에게 드러날 수 있음,” “존재자들이 인식되고, 파악되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할 것이다. 어두운 방 안, 책상 위에 놓인 상자는 불이 꺼져 있으면 거기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책상 위의 스탠드를 켜면 그 상자는 드러나고(개방되고), 우리는 그것을 ‘존재자’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 “드러남”, “나타남” 자체, 즉 존재자들이 세상에 ‘있다고’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존재자의 개방성이다. 그러나 천장의 형광등을 켜지 않고 스탠드만 켜면, 그 상자는 스탠드가 비추는 방식으로만 도드라진다. 존재자의 개방성은 드러남의 어떤 방식, 즉 도드라지게 만드는 특정 조건을 품고 나타난다.

현대 과학은 모든 존재자들을 “측정 가능한 것”, “데이터화 가능한 것”으로서, 그런 목적과 조건하에서만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구성한다. 존재자들이 드러나는 방식이 매우 특정한 조건 아래 개방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를 잘못 드러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나름의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의 드러남이다. 하이데거는 이 점을 냉철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되면, 존재자는 있는 그대로, 곧 존재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시선(기술, 효율, 생산성)에 의해 조절된 방식으로만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하이데거가 “존재자의 개방성이 더 이상 척도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존재자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 곧 우리가 보고 있는 그 개방성만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아왔는데, 사실은 그 드러남 자체의 조건, 바탕, 곧 존재 그 자체에 대해 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푸코를 소환해 하이데거를 읽을 수밖에 없다. 즉 “무엇이 드러나는가”뿐만 아니라 “왜 드러나는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 그리고 “무엇은 왜 드러나지 않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왜 우리는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 보이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말하지 못하는가. 이 굴절, 이 편향.

형이상학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서 존재자(보이는 것, 실용적인 것)만 중요하다는 태도 속에서 우리를 몰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를 담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드러난 존재자만을 대상으로 사유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로부터 존재를 역추적해야 한다. ‘데이터’와 ‘AI’가 모든 진리의 기준이 되어가는 오늘날의 사회 또한,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의 귀환’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존재는 우리 시대에 데이터와 AI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왜 다른 무엇은 드러나지 않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존재자가 우리 앞에 ‘있게 되는 방식’, 그리고 그 드러남의 조건을 더 근본적으로 물으라고 철학적으로 요청한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생기’가 다음과 같은 종말적 조건, 곧 존재자의 진리의 몰락 이후에야 가능하다고 절망적으로 말한다.

“존재가 자신의 시원적 진리 속에서 생기할 수 있기 이전에, 의지로서의 존재는 부서져야 하며, 세계는 붕괴되어야 하고, 대지는 황폐화되어야 하며, 인간은 한갓 노동에로 강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몰락 이후에야 비로소, 오랜 시간에 걸쳐, 시원의 갑작스러운 머무름이 발생한다. 몰락 속에서, 곧 형이상학의 진리 속에서 개시되었던 존재자 전체는 그 종말을 고한다.”

형이상학을 여전히 신봉하는 인류에게 존재의 숨겨진 진리—곧 계산되어 추출된 존재자들, 예컨대 데이터 속에 은닉된 존재의 진리—는 거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직 참을성 있게, 그 데이터들을 지켜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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