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버틀러, 프레데리크 보름스 『살만한 삶과 살만하지 않은 삶』

잘 알고 있듯이, 파울 첼란이라는 사람이 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시를 쓰며 한동안은 살아갈 이유와 말할 언어를 가졌지만, 결국 삶이 견딜 수 없게 되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 그의 삶은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이 교차하고 뒤얽힌 삶이었다. 어떤 사람의 삶은 동시에 살 만한 부분과 살 만하지 않은 부분이 뒤섞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태는 하루하루 바뀌기도 하며, 고통 속에서도 무언가가 지속될 수도 있다.
1년 넘게 우울증 비슷한 상태로 나름 고통을 겪고 나서, 나는 결국 ‘무엇이든 쓰는 것’이 내 마음을 정리하는 방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요즘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것이 좋다. 이곳은 공공성이나 책임감이 덜 느껴지고, 너무 꼼꼼하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이 있어서 편안하다. 읽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고, 피드백도 공격적이지 않은 안전한 곳이라 느껴진다(물론 글을 쓰고 배우고 고치는 장소로는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나는 되도록 짧은 글이라도 꾸준히 써서 올리려 하고 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요즘은 블로그를 해볼까 하고 기웃거린다. 페북은 긴 글을 쓰지 못하고, 길면 못쓴 글이고해서. 블로그 세계도 플랫폼이 많이 생겼더라… 워드프레스니 하는 것들이 괜찮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쓰고 올리면서, 나에게 강렬하게 다시 상기된 것이 있다. 직장이라는 장소 자체가 철저히 신자유주의적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오고 가는 언어는 신자유주의적 어휘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어휘란 단지 경제학적 용어들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의 감정과 태도를 다루는 말들 중에도,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과 자율성 문제로 바꿔 표현함으로써, 고통과 불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저항을 어렵게 만드는 언어의 형태들이 있다.
예컨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컨설팅 용어를 보자. 이 말은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힘”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고통과 불행을 사회가 아닌 개인의 내면적 자원으로 환원시킨다. 그렇게 해서 구조적 문제는 가려지고, ‘회복하지 못한 사람’은 무능하거나 비정상인 것처럼 간주된다. 하지만 어떤 고통들은, 사실상 회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 고통을 회복 가능한 것으로만 전제하는 언어는 현실을 왜곡하고, 책임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놓는다.
어쩌면 내가 ‘우울증’이라고 불렀던 그 정신의 상태에서 오랫동안 헤매게 된 이유도, 바로 이처럼 나를 둘러싼 언어의 장치들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직장에서 날마다 부딪히는 신자유주의적 어휘층과, 내가 숨어 공부해온 철학의 비일상적이고 급진적인 어휘층이 충돌하면서, 내 정신이 혼란을 겪었던 것도 일정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좀 폼나게 설명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전적으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우울감을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체면을 지키려는 감정이 남아 있었고, 내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감정에 깊이 함께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와 돌아보면, 그것은 그들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누구나 느끼는 일종의 양가적 반응—도와야 한다는 윤리적 감각과 동시에 “나는 아니야” 하고 거리를 두고 싶은 감정 사이에서—그들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외면, 혹은 무관심,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보호의 한 방식이었을 수도 있고, 불확실한 감정을 표출되는 기제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복합적인 반응은 어느새 타인의 고통을 사소하게 만들거나, 더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내 개인적인 위로를 받는 문제를 떠나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나의 우울감을 둘러싼 주변의 반응들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으로 ‘불행한 자들’ 혹은 ‘불행한 사건들’에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그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인식의 문제로 전환되는 그런 것이다.
나는 이런 나의 우울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난민이나 기타 소수자들의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여겨졌다. 이런 태도—외면이나 자신만의 안도감에 의한 무관심—은 정치적이다. 버틀러는 우리가 전쟁이나 난민의 상황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렇게 진단한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살 만하지 않은 삶을 목격할 때 우리는 그것이 ‘나의 삶이 될 수도 있다’는 상상 가능성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 두려움은 외면이나 자기보존적 안도감으로 이어지고, 외면은 곧 연대의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 외면은 고통을 덜어주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킨다.
기후 위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이와 동일하다. 우리는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고, 뉴스와 통계를 통해 현실을 접하면서도 그것이 내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거나, “누군가가 해결해주겠지”라는 안도감에 기대어 지금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이 외면 역시 정치적 행위인 것이고, 결국 삶의 조건을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브라질의 원주민들이 독성 토양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는 현실, 수세대 이어온 농경의 단절은 우리가 소비와 안락함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한 결과다. 기후 문제는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살 만한 삶’의 권리를 둘러싼 정치적 투쟁이며, 우리는 이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여전히 그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셈이다.
버틀러는 삶이 항상 일관되거나 정합적인 상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우 모순적인 방식으로 지속된다고 말한다. 이런 모순은 삶 속에서 긴장, 양가성, 분열로 경험되는데, 철학적으로는 ‘양극성’이나 ‘현상학적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될 수 있겠다. 이 모순 때문에 모든 사람은 이러한 취약성, 즉 개인적 취약성뿐 아니라 공통된 취약성(common vulnerability)에 노출된다. 팬데믹, 기후 문제, 전쟁 등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사건들 속에서 이 취약성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개념의 수준에서 이 모순을 구분하고 사유하는 작업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모순을 겪는 것과, 그것이 철학적으로 타당한지를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질문이다. 삶은 많은 경우 개념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지는 것이며, 바로 그 점에서 사유는 출발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 우리는 그의 우울을 완성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동체일 수 있고, ‘그’는 어떤 구체적인 슬픔을 지닌 타자일 수 있다. 이때 ‘완성한다’는 표현은 단순한 묘사나 공감을 넘어서는 능동적 참여를 뜻한다. 우리는 그를 위로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그의 슬픔을 끝까지 함께 짊어져 다른 삶의 가능성에 다다르게 하는 여정을 감당해야 한다.
우울은 참 이상한 말이다. 우울이 있어야만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으니, 이게 없으면 다른 세상도 없다. 하지만 타자의 우울을 방관해서도, 그 곁을 떠나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타자의 우울을 ‘껴안고 함께 건너가는 일’, 다시 말해 그의 우울을 ‘완성’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코 쉽거나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타자의 삶과 얽히고 감당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연대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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