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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한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기초 수업으로 해부학 강의도 함께 들었는데, 당시에는 열심히 외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참 좋아했던 선생님이 계셨다. 강의를 감칠맛 나게 해주셔서, 그 수업을 듣는 재미로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인체에 대해 내 통념을 완전히 깨뜨린 경험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뼈’에 관한 것이었다. 해부학 책을 읽다가 내 눈에 딱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뼈조직은 살아있다.” 나는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고, 그 뒤로 ‘읽기’와 ‘관절’을 엮은 조야한 글(‘정확한 정신, 정확한 쾌락’)을 써서 책에 담기도 했다.

뼈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조직이다. 다만 칼슘과 인 같은 무기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바싹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실제로 뼈대를 뜻하는 ‘스켈리톤(skeleton)’은 ‘바싹 마른 신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뼈는 외관과 달리 활발하게 활동하며 분명히 살아 있다. 마치 벽돌공과 조각가처럼, 뼈 안에서는 뼈를 만드는 세포와 뼈를 깎아내는 세포가 끊임없이 협력하며 뼈를 새롭게 만들고 다듬는다. 뼛속 깊은 곳에 있는 붉은 골수는 혈액세포를 생성하여 면역과 생명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뼈는 혈액의 원천이자 생명의 중심이다. 또한 뼈는 몸속에 칼슘과 인 같은 미네랄을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며, 우리 몸의 균형을 유지해 준다. 이 덕분에 근육은 제대로 움직이고, 신경은 신호를 잘 전달할 수 있다. 뼈가 살아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내가 특히 감동받았던 활동은 바로 이것이었다. 허벅지뼈(대퇴골)와 정강이뼈(경골)는 애초부터 붙어 있는 게 아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무릎에 관절조차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이가 걷고 뛰며 체중을 몸에 실으면, 하체는 그 부담에 반응하고, 무릎 사이에 있던 작고 미약한 종자골이 점차 자라 무릎뼈가 된다. 그렇게 두 개의 뼈를 이어주는 관절이 형성된다. 만약 아이가 걷거나 뛰지 않았다면, 그 종자골은 작고 쓸모없는 채로 남았을 것이다. 이처럼 뼈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며 자라고 연결되는 ‘살아 있는 구조’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조야하지만 진심을 담아 글을 썼고,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다들 알고 있듯이 뼈는 인체의 구조다. 우리는 흔히 ‘구조’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죽어 있는 틀, 고정된 형식, 틀지워진 도식으로 이해하곤 한다. 마치 바싹 말라 죽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뼈가 살아 있듯이, 구조도 정적인 것이 아니다. 구조는 유동적이고, 스스로 성장하며, 스스로를 갱신하고, 외부 자극에 반응하는 역동적인 체계다. 구조 그 자체가 그렇다. 구조는 단지 ‘틀’이 아니라, 생명과 시간, 기능과 감응을 통합하는 살아 있는 형식이다. 다시 말해, 구조는 메마른 추상체가 아니라, 그 자체로 생명의 조직된 힘이다.

따라서 “뼈는 살아 있다”는 말은 단지 해부학적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상상력을 자극한다. 살아 있는 구조란 외부의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재배열되며, 내부로부터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구조는 단지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그 자신으로서 존재의 조건을 생산하는 능동적 주체다. 뼈처럼, ‘구조’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체중부하에 대처해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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