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니스와프 렘, 『절대진공 & 상상된 위대함』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정현종, 「새로운 시간의 시작」 ) 내가 의도하지도, 다음 사건의 필연적 원인도 아닌 것이 새로운 시공간을 만든다고 시는 말한다. 어쩐지 에피쿠로스적인 세계를 이 시는 아주 간결하게 표현해 주는 것도 같다.
우연과 필연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스토아주의는 우주를 관통하는 신적 이성, 즉 로고스가 모든 존재와 사건을 관장한다고 본다. 자연 속 모든 사건은 로고스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필연은 곧 신의 의지이자 섭리라서 인간의 고통, 질병, 죽음까지도 이 질서 속에 포함된다. 이 사고 아래에서는 우연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인간이 무지하여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연처럼 느낄 뿐이라고 본다. 따라서 스토아주의자들은 세계를 완전히 결정된 인과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사건이 필연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철저한 결정론적 세계관을 가졌다.
현대 과학은 사실 이 필연의 법칙으로 출발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나 싶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에게 우주는 수학적 법칙으로 완전히 기술될 수 있는 기계와 같다. 뉴턴 역학에서는 모든 물체의 운동은 힘과 초기 조건만 알면 관측 가능한 수준에서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우주의 현재 상태를 완벽히 알고 있다면, 과거와 미래 모든 사건을 예측할 수 있다는 필연결정론의 절정에 이른다(이른바 “라플라스의 악마”). 이런 필연론은 지적설계론의 프레드 호일의 주장에까지 도달한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의 필연법칙은 이제 신학의 기초를 이룰 것도 같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오면 필연에 대해 회의적으로 바뀐다. 실험적으로 양자역학의 우연성이 반복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었다.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고,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자연은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며 관측 이전에는 사건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까지 주장한다. 물론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이 제시하는 관측 전 상태의 중첩과 통계적 예측에 대해 깊은 회의를 표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은 바로 이러한 우연성에 대한 비판적 조롱이다. 그는 실재를 감각이 아닌 수학적 공식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보고, 실재는 필연적 질서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한다.
이렇게 우연과 필연은 과학자들에게도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스타니스와프 렘은 과학의 언어를 빌려 소설을 구성하지만, 과학이 전제하는 인과율—즉 모든 사건은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에 대해 근본적인 의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의 다양한 가상 서평에는 이런 “우연 선행적” 사고가 다양하게 표출된다. 그는 『생명의 불가능성에 관하여』에서 “존재론적 복권”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의 탄생이 수조 개의 우연한 사건들—고대 매머드의 설사, 사라예보 대공의 암살, 탈장 수술의 실패 등—이 정교하게 연결된 결과라고 서술한다. 즉,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려면, 고대 들판을 지나던 매머드의 설사까지도 필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겹이 쌓여야 했는지를 보여준다. 확률로 말하자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아주 작은 수치(즉, 0.00000000……1에 가까운 확률)로만 표현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부존재’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불가능성, 즉 부존재성을 뚫고 기어코 실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현실—즉 ‘통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실재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철학적 제안이다. 렘은 과학적 필연법칙이 이미 일어난 사건 앞에서는 설명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과학의 인과적 구조화 방식에 한계를 제기한다.
렘의 회의는 단지 과학적 인과율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문화 자체 또한 인간의 오류투성이 생물학적 조건—고통에 민감하고, 노화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빌헬름 클로퍼의 『오류로서의 문화』에 대한 서평 형식을 띤 가상의 글에서, 렘은 문화가 ‘신체적 불만족을 정신적 의미로 전환하려는 위장된 체계’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신체적 불만족은 왜 생겨났는가? 그것은 신체와 정신 자체가 물질들의 우연한 결합에 의해 발생한 존재로서 애초에 완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연에 의거하여 인간은 형성되고 진화해 왔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조건 속에 살아간다. 문화는 이런 진화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결핍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위장 기술’이다. 그러나 렘이 서평을 쓰고 있는 가상의 책 『오류로서의 문화』의 저자는, 결국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객관적 보완 앞에 문화가 불필요해질 정도로 인간 존재의 결핍이 메워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상의 기술론자는 기술을 통해 결핍이 해소될 것이라는 필연적 미래를 상정하지만, 이 가상의 저자든 서평자인 렘이든 모두 ‘우연이 선행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사고는 디지털 존재의 윤리적 가능성을 다룬 『논 세르비암』에서도 이어진다. 이 텍스트에서 ‘페르소노이드’라는 디지털 생명체들은 철저히 수학적 구조 속에서 진화하지만, 창조자를 인식하고도 “나는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렘은 이 선언이야말로 자율성과 인격의 출발점이라고 보며, 완벽한 결정론적 체계 속에서는 진정한 윤리와 문화가 발생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즉, 우연성,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이성과의 충돌이 있어야만 디지털 존재조차도 ‘존재’라 불릴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렘은 모든 질서와 필연의 전개 이전에 ‘우연’이 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 점에서 나는 렘이 에피쿠로스 철학과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직선 운동이라는 필연의 체계를 전제하면서도, 어느 순간 발생하는 ‘클리나멘(clinamen, 편향)’이라는 우연을 통해 새로운 필연의 경로가 열린다고 보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게 우연은 필연을 뒤흔드는 예외적 개입이다. 즉, 그는 직선 운동이라는 필연을 기본 전제로 삼고, 클리나멘은 이 필연 구조 속에 삽입된 단 한 번의 예외(우연)로서 자유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필연이 기본축이고, 우연은 개입의 방식이다. 그러나 렘에게 우연은 오히려 모든 필연적 전개의 전제이자 조건이다. 그는 모든 존재가 본래적으로 우연한 사건들의 연쇄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과학이 말하는 법칙이나 패턴은 이미 벌어진 우연들을 사후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틀에 불과하며, 필연은 그 우연을 정지화하고 해석하려는 장치에 불과하다. 그래서 렘에게는 우연이 원인이며, 필연은 그 결과다. 렘은 세계가 우연이라는 균열에서 시작해, 그 위에 임시로 덧대어진 설명으로서의 필연을 살아가는 공간임을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렘의 사유는 에피쿠로스의 세계관을 전복했다기보다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렘의 사유에서는 클리나멘과 같은 ‘우연한 편향’이 바로 세계의 최초이며, 『생명의 불가능성에 관하여』의 “존재론적 복권”은 수많은 비합리적 사건들의 연결이 존재의 출발점임을 밝힌다. 여기서 ‘질서’나 ‘필연성’은 이 우연 이후에 사후적으로 발생하는 해석틀에 불과하다. 따라서 렘은 우연을 세계의 본성 자체로 확장하고, 필연은 그 부산물로 간주한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자유의 가능성을 여는 우연’을 존재론 전체의 원리로 확장하며, 필연적 질서는 ‘기억하기 위해’, ‘살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적 장치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렘은 클리나멘을 세계의 시작점이자 전개 방식으로 삼는 철학적 과감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렘의 존재론은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말하는 ‘클리나멘’을 세계 구성의 중심 원리로 확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클리나멘을 필연적 세계에 침입한 우연한 균열로 간주했다면, 렘은 그 우연을 세계 자체의 구조 원리로 재정의한다. 렘에게 필연은 우연 이후의 규칙성에 불과하며, 세계는 본질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들의 반복적 충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이 시 구절,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아라/하나둘 내리기 시작할 때/공간은 새로이 움직이기 시작한다.”(정현종, 「새로운 시간의 시작」 )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의도하지도, 다음 사건의 필연적 원인도 아닌 것이 새로운 시공간을 만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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