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자들로 구성된 자기이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익명의 타인들의 자의와 변덕에 휘둘리는, 전락한 자기도 숨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익명의 사회적 시선과 타인의 사고에 휘둘려 생각하고 행동한다. 타인의 시선이 불편한 이유는 그 시선에 따라 내가 평가받는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전락의 강도에 따라 불편함도 변한다. 아마 내가 단지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해질 것이다. 이러한 소박한 실재론은 단순하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결국 철학이 도달해야 할 자리 또한 그곳이다. 그러므로 ‘소박하다’는 말은 조야한 철학적 구조를 가리키는 동시에, 철학이 끝내 도달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예감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돌고 돌아 들어가는 묘자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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