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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차개정잡문』 / 첸리췬, 『살아 있는 루쉰』

계보학(généalogie)이 무엇일까? 푸코는 본격적으로 계보학적 방법론에 포섭되기 이전에 기원(Ursprung)과 유래(Herkunft)를 구분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니체를 경유하면서 ‘기원’이란 형이상학적 신화, 다시 말해 모든 사물에는 본래의 순수한 모습이 있으며, 지금의 모든 것은 그것이 오염되고 변형된 것이라는 정체성 중심의 환상을 전제로 한, 그 순수한 출발점이라고 본다. 그것은 역사적 실체를 가리킨다기보다, 도덕, 가치, 이성, 진리, 자유 같은 관념이 언제나 어떤 ‘고귀한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려는 경향 그 자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반면 ‘유래’는 순수한 출발점이나 원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어떤 정체성이나 개념이 어떻게 이질적인 요소들과 뒤섞여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성이나 자유 같은 어떤 가치가 단일한 형이상학적 진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 실수, 충돌, 편향, 신체적 조건들의 교차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말하자면 계보학은 이 ‘유래’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 유래를 탐색하는 것일까? 흔적으로 찾아낸 우연적 사건, 실수, 충돌, 편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들 그게 뭐에 쓸모가 있다는 걸까.

루쉰의 『차개정잡문』에 ‘은자’라는 잡문이 있다. 루쉰이 이 글을 쓸 즈음, 린위탕은 “한적(閑適)으로 격조를 삼는” 소품문을 주장했다. 한적은 외부의 시끄러움이나 욕망에서 물러나, 자연이나 일상 속에서 조화롭고 여유롭게 사는 삶의 분위기를 의미한다. 가만있을 루쉰이 아니다. 루쉰은 기어이 린위탕을 비꼬면서 ‘은자(隱者)’라는 존재의 사회적 실체, 그 이면의 욕망과 생존의 구조를 날카롭게 폭로하려 한다. 흔히 도연명 같은 ‘은자’는 세속에서 물러나 자연 속에서 고고하게 살아가는 이로 상상되지만, 실제로는 ‘은거’ 역시 하나의 사회적 직업, 곧 생계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이다. 도연명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그게 더 수월하였고, 그런 생계적 구조가 은폐되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루쉰이 보기에 밥을 먹기 위한 길이 관리(벼슬)일 수도 있고, 은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밥이다. 아무리 은자의 행세를 해도 먹고살 방법이 없다면 그 ‘은(隱)’은 성립되지 않는다.

‘은자’는 그래서 도시에 간판을 걸고 조용히 존재하지만, 자신을 관리하지 못하면(간판에 기름칠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자신을 돈냄새 싫어하고 자연에 은거하는 자로서 끊임없이 브랜딩하지 않으면!) 생계가 끊긴다. 은자 주변에 모인 ‘졸개’들도 실은 그 은자의 위세에 기대어 밥줄을 이어가려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고요한 은거’라는 허울 아래 감춰진 또 하나의 경제적·사회적 서열이며 생존 방식이다. 그러니까 루쉰은, 고상한 듯 보이는 은거 역시 실은 먹고사는 길이고, 은자의 고요는 끊임없는 자기 연출과 생존술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통렬하게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루쉰은 현대 은자론의 근저에 자기 연출과 생존술의 흔적을 찾아내 그 유래를 조롱과 함께 기어올린다.

이번에 이 책과 함께 읽은 첸리췬은 루쉰을 전통문화 단절자로 비난하는 경향을 비판하면서(그것은 오해이거나, 무지이다!), 루쉰이 오히려 전통문화를 다시 사고하고 해석함으로써 그것을 단지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유의 대상으로 전환시킨다’고 말한다. 루쉰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통문화를 전통으로서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해체하고, 그 해체된 잔해들을 가지고 “현대를 다시 사유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를 다시 사유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란 이 말이 내게는 푸코의 계보학적인 방법과 공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루쉰은 전통문화를 옹호하거나 심지어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파편화된 흔적들을 다시 꺼내어 현대를 사유하기 위한 재료로 삼는다. 그는 “기원을 폭로하고, 유래를 해부하여, 정체성을 해체하는” 계보학자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루쉰에게 전통은 질문하고 해체해야 할 장치이고, 바로 그 해체의 와중에서 현대를 새롭게 사유할 가능성을 연다. 이건 푸코가 정확히 노렸던 바로 계보학의 실천적 행위이지 않은가!

이렇게 보면 공자에 대한 루쉰의 계보학적인 시선도 남다르다. 루쉰에게 공자는 성인도, 철인도 아니다. 후스가 공자를 ‘건국의 스승’으로, 저우쭤런이 ‘쓸쓸한 철학자’로 재해석했다면, 루쉰은 더 급진적이고 해체적인 시선으로 그를 다룬다. 그는 『맹자』의 말을 빌려 공자를 “시대의 형세에 적응한 사람”이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제자 대부분이 출세하지 못했고, 유일하게 믿었던 자로마저 참혹하게 죽었다는 점을 들어 공자의 무력한 현실을 강조한다. 루쉰에게 공자는 살아서는 비참했고, 죽어서는 권세가들에게 소비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공자보다도 공자를 신성화한 유가 추종자들, 권력에 기대어 허위의 성인을 조작한 자들의 권력관계이다.

이런 해체는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중국인의 ‘현대적 의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해부하는 계보학적 사유의 결과이다. 루쉰에게 현대 중국인의 의식이란, 서구의 과학 문명이 공격하는 눈앞의 현실을 정확히 보면서도 그것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고, 도리어 정신승리에 빠지는 왜곡된 구조 안에 휘말려 있다. 그는 이 의식—보는 바와 말하는 바가 다른 의식—을 거슬러 올라가, 그 유래의 흔적을 찾는다. 전통문화 자체가 사실은 자기기만의 산물이었다는 것. 루쉰은 현대의 의식에 무력함의 흔적이 어떻게 덧씌워졌는지를 집요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 순간에야 우리는 건국의 성인이나 쓸쓸한 철학자라는 현대적 무력함을 벗어나, 공자 그 자체를 사유의 대상으로 온전하게 세울 수 있게 된다. 공자를 둘러싸고 어김없이 존재하고 있는 현대 중국 학자들의, 그리고 그 배후에 서려 있는 현대 중국의 권력관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루쉰의 잡문은 계보학의 단편 소설집과도 같다. 온갖 중국의 계보가 마치 연습문제처럼 엄청나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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