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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주역 공부를 할 때, 루쉰이 ‘운명’이라는 잡문에서 중국인들이 점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쓴 것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도 특유의 냉소적인 비꼼이 스며들어 있긴 한데, 내가 보기엔 아주 드물게 그 냉소를 비집고, 중국인 특유의 실용주의적 낙관성과 유연성을 조명하고 있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병오년생 여성에 대한 미신—남편을 여럿 죽인다는 믿음—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지만, 중국에서는 그 운명조차 바꿀 방법을 찾으려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컨대 만일 여성이 남편을 여섯 명을 죽인다는 점괘가 나오면, 도사가 복숭아나무 인형에 결혼식을 여섯번 치러 액운을 미리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그 운명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루쉰은 묘하게도 이런 사고방식을 단순히 미신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이 점술에 따라 운명을 조작해버리면, 놀랍게도 결국 운명으로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인 특유의 “운명은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운명 앞에서 수동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응하려는 능동성으로 나타나 버린다. 여기에 모든 점술의 민중적 요소가 드러나는데, 점술은 불행이라고 여겨지는 불안들과 싸우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런 도구적 점술관에 대해 지배층은 그것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던 것이고.

물론 루쉰은 이런 미신은 이성적이기보다는 또 다른 미신으로 대체될 가능성도 높다고 말한다. 토속 점술이 다른 종교로 바꾸어 다시 기복신앙이 되어버리는 걸 많이 보아 왔으니 당연한 우려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루쉰은 이것을 “과학과 실천”으로 치환된다면 이 낙관성은 진정한 진보로 전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점술의 보좌를 과학의 보좌로 바꾸는 것. 결국 루쉰은 “운명에 저항하는 미신”과 “운명 앞에 굴복하는 미신”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며, 중국인의 정신 속에 숨어 있는 유연한 실천성과 그 가능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글을 오늘 다시 읽었는데, 아주 묘하고 특이한 글이다. 중국인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하던 루쉰이고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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