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마사 마사키, 『현대 미국 사상』





어떤 신사가 친구 4명에게 100만 원을 나눠주려 한다. 미국의 정치철학 전통 속에서 이 단순한 문제조차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된다.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는 말한다. “시장에 맡기자.” 출발선이 달라도 상관없다. 시장이 모든 것을 조정할 것이라 믿는다. 반면 사회적 자유주의자들은 최소한의 배려를 주장한다. “어려운 친구에게는 조금 더 주자”는 식이다. 하지만 이들도 기본적으로 시장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존 롤스는 자유주의자 중에서도 이례적이다. 그는 ‘무지의 장막’이라는 가정을 도입해, 가장 불리한 상황에 놓인 사람의 입장에서 정의를 논한다. “가장 어려운 친구가 더 많은 몫을 받을 수 있다면, 다른 친구들도 약간 덜 받아도 괜찮다.” 정의는 불평등을 허용하되, 그 불평등이 가장 불리한 이에게 이득이 될 때만 정당하다고 본다. 한편, 로버트 노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는 소유권을 절대시한다. “돈을 가진 사람이 분배 방식도 정한다.” 강제적인 재분배는 자유에 대한 침해이자 도둑질이다. 정의는 결과가 아닌 소유의 정당성에서 출발한다.
이에 공동체주의자들, 샌델, 매킨타이어, 왈저, 테일러 등은 이 자유주의자들의 추상적 원칙을 비판하면서, 개인의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고려한 분배를 강조한다. “각자의 사정과 공동체 내 역할을 고려해야 정의롭다.” 정의는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공동체의 맥락에서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리처드 로티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원칙 자체보다 “상호 동의”를 중시한다.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합의와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친구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나누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의’다.
미국 사상은 자유주의자, 공동체주의자,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각기 사유의 영토를 점유하면서도, 서로 레고처럼 맞물리며 하나의 복잡한 사상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 구도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면, 그것은 더 이상 다른 사상들과 나란히 배열된 어떤 하나의 정책 패러다임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다양한 정치경제적 옵션들을 전략적으로 배열해두고, 그때그때 최적화된 통치 형태를 선택하는 메타-통치 프레임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 생각에 신자유주의는 레고처럼 어떤 것으로 변신이 가능한 지배 블럭의 통치 복합체이다.
예컨대 호황기에는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앞세운 무정부주의적 자본주의, 즉, 로스바드나 데이비드 프리드먼식 자유지상주의가 작동한다. 이때 국가는 존재감을 감추고 시장 메커니즘이 전면에 나선다. 반면 위기나 침체기에는 국가는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노직의 ‘야경국가’처럼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거나, 뷰캐넌의 입헌적 생산국가 모델처럼 공공재 조달과 제도 설계를 수행하며, 필요시에는 케인스주의적 유동성 공급을 통해 시장 붕괴를 막는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통치 기술의 스펙트럼을 극단에서 극단까지 유연하게 활용하며, 그 통치 가능성의 지평을 끝없이 확장시킨다. 그 뭐든 레고처럼 조립해서 사용할 줄 안다.
심지어 파쇼적인 것 까지 조립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의 계엄 사태와 트럼프 현상을 통해 이 지평은 더욱 넓어졌음을 실감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유연성은 이제 과거에 비합리적이라 여겨졌던 통치 형태조차도 전략적 ‘옵션’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트럼프식 포퓰리즘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근대 자유주의의 합리성과 규범적 질서를 파괴하면서도, 위기 상황에서는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통치 기술로 기능한다. 이러한 형태 하나하나가 “통치 모듈”로 작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계엄 정권 또한 이와 유사한 ‘보수 파시즘적 모듈’로 이해할 수 있다. 조야하고 비상식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단순한 탈선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통치성 내부에서 실험되고 있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아직은 정교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보다 세련된 형태로 재활용될 수 있는 ‘예비 모듈’로 진화할 가능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모두 알다시피, 민주당과 같은 온건 자유주의 세력—겉으로는 진보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체제 유지를 담당하는—은 이미 오래전부터 안정적인 통치 모듈로 자리잡아, 체제의 연속성을 관리해왔다. 어쩌면 이재명이 민주당을 ‘보수정당’이라 지칭한 것은, 단지 공공연한 사실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체제 전환의 상상력을 상실한 채, 체제 유지를 위한 기술로 이용되고, 그 결과 계엄정권 같은 파시즘적 모듈의 귀환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박근혜 정권 이후 되돌아온 최근의 사태를 보면 명백하지 않은가.
더 나아가 파시즘 모듈의 핵심 기능은 단지 대중의 정서를 동원한 통치 효과에 그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이 모듈을 일종의 자기조절 장치로 불가피하게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이해관계의 충돌과 계급 내 분열이 지배 블록의 내파로 이어질 위기에 직면했을 때, 신자유주의는 일정 정도의 ‘비합리적이고 일시적인’ 폭압 통치를 자발적으로 허용함으로써, 그 내부 균열을 봉합하는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보면 파쇼 모듈은 권력 내부의 발작을 억제하는 응급처치로 기능한다. 만약 이 장치 없이 체제가 일관된 합리성만을 고수한다면, 내부 붕괴는 오히려 더 빠르게, 더 강력하게 찾아올 수 있었다. 마치 급체를 겪었을 때, 강하게 등을 내리쳐야 하는 순간처럼, 파시즘은 통치 체계의 예외가 아니라 구조적 자기보완 장치로 통합되어 있다고도 보인다. 자본주의가 공황이라는 위기를 품고 있는 것처럼. 정치에도 파쇼를 내부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는 ‘예외상태의 상시화’라는 통치 기술의 진화를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국가는 더 이상 헌법적 규범이나 제도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통치 모듈을 교체하고 재조립한다. 규제 없는 시장, 복지국가, 유동성 개입, 심지어 위계적 정동정치에 기반한 파시즘까지—모두가 하나의 통치 알고리즘 안에서 호환 가능한 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보적인 철학은 단지 제도 개혁이나 도덕적 비판, 그저 그런 이론의 복제에만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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