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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들뢰즈는 철학자이기 전에, 아주 탁월한 철학교사라고 생각해 왔다. 들뢰즈가 푸코의 개념을 절묘하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있어서 하나 소개한다. 그 개념은 푸코의 “아카이브”와 “에피스테메”라는 개념. 여기서도 들뢰즈가 푸코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아주 이상한 지대로 우리를 이끌어 개념을 깨닫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들뢰즈가 푸코의 “아카이브” 개념을 단순한 문헌 모음이나 기록의 집합이 아니라 가시적인 것(볼 수 있는 것)과 언표가능한 것(말할 수 있는 것) 사이의 단층과 긴장, 즉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체계의 복합적 장(場)으로 사유하려고 한다. 여기서 ‘아카이브’란 시대의 시각적 조건과 언어적 조건이 구성하고 교차하는 장소이자 역동적인 구조이며, 푸코의 철학의 핵심적인 무대다. 들뢰즈는 “아카이브는 청각-시각적이다”라고 말한다(여기서 청각은 언표, 시각은 보는 것). 이는 푸코의 사유에서 말과 시선, 언표와 가시성이 각기 독자적인 체계로 존재하며, 그 둘은 동일화되거나 단순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따른다. 이를테면, 우리는 어떤 시대의 광기를 보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보는 방식(빛의 체제)과 그것을 말하는 방식(언어의 체제)은 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둘 사이에는 이접(disjunction), 다시 말해 환원불가능한 틈이 존재한다. 말과 시선의 단층과 그 틈 사이라는 이것, 바로 이것이 들뢰즈의 독창적인 푸코 설명방식이다.

말과 시선의 단층과 그 틈 사이를 쉽게 이해하려면 이런 예를 들어보자. 17세기에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 즉 ‘광인(狂人)’을 어떻게 봤을까? 그 시대 사람들은 광인을 거리낌 없이 구경거리로 여겼다. 사람들은 그들을 눈으로 보고, 광인의 모습에서 신의 저주나 악마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즉, 광인은 ‘보이는 방식’ 속에서 하나의 기이한 장면이자 ‘시선의 대상’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의 가시성의 체제, 즉 “시선의 구조”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광인에 대해 말했던 방식은 또 달랐다. “광인은 신의 뜻을 어긴 자다”, “광인은 이성을 잃은 자다” 같은 말들이 있었다. 이 말들은 ‘언표’, 즉 그 시대가 광인을 어떻게 설명하고 말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언어의 체제이다. 즉, 같은 ‘광인’이라는 존재를 놓고도, 눈으로 볼 때는 이상하고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고, 말로 설명할 때는 죄인이거나 신비한 존재처럼 말해졌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푸코 사유는 바로 이것이다. 시선으로 본 것과, 말로 표현한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 이 틈을 무시하고 “보이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시대가 작동하는 방식, 즉 지식이 형성되는 조건을 놓치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시대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무엇을 보았느냐, 무엇을 말했느냐를 넘어서, 무엇이 보일 수 있었고, 무엇이 말해질 수 있었는가, 그리고 그 둘이 어떻게 엇갈리고 어긋났는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틈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아카이브의 장,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또 어떤 것들은 보이지만 말하지 못하고, 반대로 말은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이때 아카이브란,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의미를 알게 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고, 어떤 것을 말할 수 있게 되는 장이다. 다시 말해, 아카이브는 지식(savoir)의 조건, 즉 어떤 시대가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고 체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구성의 장인 셈이다.

가시적인 것과 언표가능한 것 사이의 이격을 “환원불가능한 거리”로 인식하는 들뢰즈의 해석은, 인식론에 대해 전통적으로 기대해 온 대응·일치의 모델을 해체한다. 아는 것(connaître)이란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이 일치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실, 연결의 장치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인식론이 형성된다. 푸코는 인식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론, 즉 말과 시선 사이의 틈에 대한 인식론을 제창하고 있다.

따라서 ‘아카이브’란 더 이상 과거의 정보를 모아놓은 창고가 아니라, 말과 시선의 단층과 그 틈 사이를 사유하게 만드는 힘의 지층, 즉 역사적 시대마다 그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재현하는 에피스테메(epistémè)의 조건이 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곧 푸코 철학의 진정한 지질학적·고고학적 탐사의 장소이며, 말과 사물의 파열 속에서 새로운 인식의 조건들을 드러내는 장이 된다. 들뢰즈는 이것은 언표와 시선을 절묘하게 엮어서 알기 쉽고 명료하게 설명해준다. 들뢰즈는 정말 탁월한 철학 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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