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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류, 『전문관리계급에 대한 비판』

공부방은 대로변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서 한참 걸어야 나오는 허름한 상가건물에 있었다. 출입구에 간판이나 안내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301호”라고 쓰인 하얀 메모 종이가 코팅되어 붙어 있을 뿐이다. 고장 났는지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아마 저 문은 하루종일 열려 있어서 제 역할을 못한지 오래인 것 같았다. 물론 아무나 오지는 못한다. 여기 공부방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주인장에게 누군가 소개를 해줘야 하니. “그래도 그곳은 제대로 책을 읽기는 하는 곳이야. 내 마음에 딱 맞게 자본론을 한따옴 한따옴 제대로 읽어”라고 지인이 말했다.

주인장은 비쩍 마른 몸체에 안경 너머로 독수리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슨 일해요?” 그 독수리가 말했다. 그는 내가 다니는 일터와 알고 있는 내용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식이 아니라 나의 생활과 투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들을 물어보았던 것 같다. 어떤 책들을 읽는지, 글은 쓰는지 등등 독서 습관도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내 생활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거의 대답을 하지 못하고 “뭐, 제대로 하는 것은 없습니다만,”이라고 어줍잖게 대답하고는 “그러나 자본론 만큼은 읽어보고 싶습니다!”라고 용감하게 말했다. “자본론은 노동자가 아니면 제대로 읽지 못해요.”그는 말했다.“그래서 나는 자본론을 읽을 사람인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론 1권 어딘가 뒤적일 무렵 그는 우리를 이끌지 못했다. 그는 더 이상 공부방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자본론”이라는 것 주위로 사람들이 계급적 투지로 모이는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물론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인 구조 자체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이 책은 여기에 전문 관리 계급(PMC)이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자의 직접적인 계급적 경험과 연대를 은폐해왔던 것도 아주 크게 기여했다고 폭로한다. PMC는 능력주의와 전문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하지만, 이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왜곡하고, 착취 구조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진정한 사회적 변화는 PMC가 아니라, 생산과 노동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 중심의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며, PMC는 그 과정에서 비판적 성찰과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 책은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PMC의 이념적 허위를 지적하면서, 노동자 중심의 사회적 연대를 강조한다. 말하자면 “자본론” 주위로 모이던 그 계급적 투지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독서와 관련된 논의는 인상적이다. 뉴욕타임스 서평가 가쿠타니 미치코와 오바마에 대한 비판은 독서가 계몽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포장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오바마는 독서를 통해 타인에 대한 공감과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그는 PMC 엘리트로서 금융 위기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독서는 오히려 PMC의 도덕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고, 사회적 현실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는 독서를 통한 공감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정치적 무기력과 위선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오바마의 이런 모습을 따라하는 것을 보면 이런 위선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이 비판은 PMC의 이념적 자기기만을 꿰뚫어 보며, 더 깊은 정치적 자각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면서도 덧붙여본다면, 내가 가장 두려운 문제는 단지 전문 관리계급(PMC)의 지배와 위선뿐 아니라, 노동자와 소수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감염되어 갈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어쩌면 이미 우리 생활 그 자체가 그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감염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때가 있다(나는 이미 그 계급이고 거기서 벗어나지도 못하는데, 아닌 척하고 있는 것이 가증스러울 따름이다). 노동자와 소수자들도 단순히 PMC가 가진 권력과 방식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방식을 내면화하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PMC처럼 행동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는 단순히 어리석음이나 무지가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 때문이다. 오늘날 소수자들은 연대하기 위해서조차 PMC의 방식을 따라야 하기도 한다. 예컨대 투쟁과 관련한 행사를 해도, 콘서트를 열어 PMC 방식처럼 고상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만들어야 연대의 장이 가능해지고, 그럴 때에만 자신들의 존재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오히려 소수자들의 고유한 연대 방식을 지우고, PMC가 만들어낸 결과와 권위만을 요구하는 문화에 스스로 편입될 위험에 빠진다.

이런 구조 아래서라면 소수자들도 스스로의 경험과 고유성을 기반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PMC가 규정한 방식, 즉 감추고, 보여주지 않고, 결과만을 내세우는 연대 방식을 추구할 수 밖에 없게 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소수자들 스스로도 은폐와 권위의 언어에 사로잡히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연대가 오히려 PMC적 가치를 재생산하면서, 노동자와 소수자 내부에서조차 진정한 연대와 투쟁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결국 다중 전체가 PMC화되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PMC적 이데올로기를 확대 재생산하는 주체가 되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야말로 단순한 PMC의 지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 소수자들과 노동자들은 진정한 해방적 연대의 방식을 상실해버리고, PMC적 방식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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