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무브 Translation/정치경제학 읽기
던컨 폴리, 수학적 형식주의와 정치경제학적 함의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평소 관심있는 주제이고, 늘 주장하던 측면의 일단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일반균형 모델은 사실 단순화된 이론적 추상일 뿐이다. 그러나 경제학 내에서는 이 모델이 점차 ‘실재’로 간주되고, 경제 정책이나 이론의 토대가 되었다. 이 경향은 수학적 모델이 제공하는 명확성과 엄밀성이 오히려 환상적 해석과 오류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대해 던컨 폴리는 비선형적이고 복잡한 시스템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경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과 변동성을 모델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 그는 특히 베이지안 접근 같은 것을 제시하며, 기존의 정보와 새로운 데이터를 통합해 계속해서 현실을 업데이트해 나가는 사고 방식을 강조한다.
하지만 던컨 폴리의 이런 사고는 이미 경제학 내부에 매우 진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사고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게 그다지 신선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이미 행동경제학은 경제적 의사결정에서의 비합리성, 제한된 합리성, 심리적 편향을 다루었고, 복잡계 이론은 경제를 비선형적이고 동적인 시스템으로 해석해왔다. 베이지안 통계 역시 계량경제학 내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경제학적 사고’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기존과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던컨 폴리의 이야기를 일단 옹호하여 그의 주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아마 폴리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논의는 개별적인 이론적 보완이나 특정 분야의 혁신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 행동경제학은 주로 개인 단위의 의사결정 오류를 밝혀내는 데 집중했지만, 거시적 시스템이나 구조적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복잡계 경제학은 이론적 시뮬레이션과 개념적 논의에 머무른 채, 실제 정책이나 제도 설계와의 연결이 약했다. 베이지안 계량경제학은 일부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경제학 전반을 변화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 기존의 행동경제학이나 복잡계 이론은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대해서는 비교적 침묵해왔다. 그러나 던컨 폴리의 새로운 사고는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전면적으로 문제 삼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던컨 폴리의 ‘새로운 사고’가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패러다임 확장이 아니다. 이는 기존 경제학이 가진 근본적 한계와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인식하고, 경제학의 이론적·방법론적·철학적 토대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시도들은 경제학의 기본적 전제(균형, 합리성, 효율성)는 유지한 채, 약간의 ‘보완적 접근’을 시도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 결국, 던컨 폴리의 주장은 경제학의 핵심 방법론 자체—모델링, 검증, 데이터 해석의 방식—을 철학적·방법론적으로 다시 설계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에 다소는 회의적이다. 그는 경제학을 복잡 적응 시스템으로 재구성하고, 베이지안 접근과 같은 새로운 통계적 방법론을 통해 경제학의 이론적·철학적 전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결국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은 그 본질상 정치적 함의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설령 정치적 담론을 제거하고자 시도한다 해도, 그것은 이미 그것이 품고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 내재되어 있다. 경제학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계급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학문적 구조 속에서 발전해왔으며, 아무리 수학적·통계적 방법론을 통해 ‘중립성’을 확보하려 해도, 그것은 결국 기존의 착취적 구조를 강화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 안에 포섭된 수학, 통계 그 자체가 오염되어 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단순히 경제학을 재배열(re-shuffling)하거나 재구성(restructuring)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경제학으로는 아무리 철학적 전환을 시도한다 해도, 그것은 기존 체제의 변두리를 수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경제학의 전면적 해체와 재배치다. 즉, 기존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이 만들어 놓은 수학적 모델과 방법론들을 소수자-프롤레타리아 관점에서 철저히 해체하고, 그 요소들을 소수자 관점의 배치 속에서 재조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기존 경제학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를 수정하고 확장하거나 패러다임을 전환해가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경제학 자체를 소수자 논리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의미한다(물론 소수자 관점이 좀 모호할 수 있다. 어쩌면 시작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 출발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때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산업노동자만을 가리키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산업 노동자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폭넓은 지배-저항 구조 속에서 새로운 주체를 포착하려는 시도를 전제로 기획되어야 한다). 아무리 베이지안 통계와 같은 새로운 방법론을 도입하더라도, 그것이 기존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틀 속에서 활용되는 한, 결국 착취적 구조를 정당화하고 복무하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결국 경제학은 이미 정치적이며, 특정 계급의 이익을 전제로 구성된 담론이다. 따라서 진정한 전환은 기존의 경제학적 틀을 유지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소수자의 시각에서 경제학을 해체하고 재배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기존 이론을 비판하거나 보완하는 수준이 아니라, 경제학의 구조적 틀 자체를 전면적으로 해체하고, 계급적·역사적 관점에서 새롭게 재구성하는 급진적인 접근이어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서 부르주아 정치를 프롤레타리아 정치로 바꾼다고 해서 곧바로 프롤레타리아 정치경제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경제학은 어떻게 해체될 수 있는가? 방향은 분명하다. 경제학 내부에서 소수자로 진입하는 방식(예: 던컨의 방식)이 아니라, 소수자의 삶에서 경제학으로 접근하는 방식이다. 경제학적 방법론을 재조립하기에 앞서, 먼저 소수자의 삶의 방식과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그 관점에서 경제학의 방법들을 재구성해야 한다. 예컨대, 소수자의 시각에서 본 주식은 착취당한 노동자의 청구권이다. 그렇다면 그 주식 안에 포함된 노동자 청구권의 가치는 어떻게 산정되는가?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부르주아가 만들어놓은 옵션 가격결정모형을 전유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립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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