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소바냐르그, 『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겨울이 오면 들뢰즈가 떠오른다. 들뢰즈를 읽으면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1990년 겨울이 떠오른다. 입대 준비를 하던 친구가 수업 시간에 들은 들뢰즈를 뭔가 고상하게 어쩌고 저쩌고 소개해주던 때. 그때 나는 그가 이 겨울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때 그 느낌이 계속 남아서, 흣날 중년 직장인인 내가 철학을 공부해보겠노라고 발심하게 만든 어떤 기억이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우리 삶이란, 그리고 그 삶을 이끄는 생각이란, 놀랍게도 그런 소소한 기억들로 움직인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내가 두 번짼가, 세 번짼가 하는 세미나를 <차이와 반복>으로 삼고 찾아간 것은 2008년 봄이다. 교보문고에서 민음사 번역본을 사서, 무작정 찾아간 세미나. 지금 생각하면 좀 같잖은 일이지만 그것은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첫 세미나를 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무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 책을 읽는 동안, 그리 우울한 기분은 아니었다. 만약 누가 철학책을 읽는 데 시작하기 좋은 책이 있다면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꽁꽁 언 겨울밤에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그러나 생기 가득하여 곧 봄을 부를 들뢰즈 철학책”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내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책 – 그것이 바로 “철학책”이다. 물론 니체와 스피노자와 장자와 공자를 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들뢰즈를 읽기 위해서는 들뢰즈만의 계절이 있는 기분이 든다. 봄을 앞둔 겨울 끝 말이다.
이제와서 말해보자면 들뢰즈는 복잡한 개념들을 많이 사용해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 속을 파보면 매우 단순한 철학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며, 이를 계획적이고 전략적으로, 때로는 편집증적으로 구조화한다. 들뢰즈가 구조화한 개념들을 표로 정리한다면 그의 철학은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들뢰즈의 철학 개념들을 모두 모아서 시대별로, 체계적으로 재구성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비웃지는 말아달라. 내 망상으로는 아주 많은 시간을 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들뢰즈는 푸코와는 기질적으로 매우 다른 철학자였기에, 오히려 서로에게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런 두 사람이 도달하는 지대는 너무나 유사한 장소이다. 그러고보면 그 둘은 분신같기도.
푸코가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통해서 대상에 다가가지만, 들뢰즈는 푸코만큼 기상천외한 철학적 시도를 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서재에서 책을 보면서 기존의 철학적 개념을 다듬어내는 정도의 작업을 한 사람이다. 그는 칸트, 베르그손, 스피노자라는 철학적 거장들의 개념을 충돌시켜 역동적인 철학 운동을 만들어냈다. 기존 철학에서 정적으로 배열된 개념들을 들뢰즈는 마치 인형극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고정된 인형들은 움직이지 않지만, 들뢰즈는 감성적 바람을 불어넣어 이들을 역동적으로 작동하게 했다. 이는 마치 목수가 만든 피노키오가 감각적 숨결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개념적 역동성이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이념의 행동학’이다. 바로 이것, 개념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이 들뢰즈의 중대한 기여이다. (물론 언젠가 이런 견해를 세미나에서 이야기하니까, 어떤 사람이 그게 개념들을 움직이게 한 것인지, 아니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맞다. 들뢰즈를 비판하는 것은 개념-운동의 효과에 있을지도 모른다)
들뢰즈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개념을 복합적으로 연동시켜 기존 철학 체계를 변형시키고, 전혀 새로운 철학적 구조물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새로운 구조물이 “주체”의 역동성을 발견하는데까지 간다.
이걸 처음 읽었던 때로 돌아가서 내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게 차근차근 정리해보자. 플라톤주의에서 본질과 가상은 이원론적 구도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들뢰즈는 칸트의 초월론적 분석을 빌려 가상을 단순히 본질의 결핍으로 보지 않고 ‘드러남(현현, Erscheinung)’으로 전환시킨다. 가상은 더 이상 본질의 결핍이나 단순한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발생하는 현현의 장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전환에서 본질은 더 이상 가상의 배후에서 그것을 보증하는 원인이 아니며, 가상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론적 조건일 뿐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개념 전환을 통해 기존의 이원론적 구도를 ‘통접적(conjonctif) 개념쌍’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단순히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내적으로 작용하는 관계로 개념들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한 장의 사진을 떠올려 보자. 플라톤주의적으로 보자면, 사진 속 풍경은 현실 세계의 본질을 결핍한 모사일 뿐이다. 사진은 그저 ‘진짜’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들뢰즈적으로 해석하면, 사진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자체로 하나의 ‘현현’이다. 예를 들어, 빛과 구도, 순간의 감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사진은 단순히 ‘현실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만의 독자적인 현실성을 만들어낸다. 즉, 사진은 단순히 본질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새롭게 드러내는 또 다른 현장이다. 본질(우리가 보통 실제 풍경이라고 생각하는 자연 풍광 등)은 사진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일 수는 있어도, 사진 자체가 가진 현실성을 지배하거나 결정하지는 않는다. 이는 가상이 본질의 결핍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사건(그것 자체로 온전히 풍성한 사건)이라는 들뢰즈적 관점을 보여준다.
이 전복은 들뢰즈 자신의 개념적 혁명이기도 했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은 ‘칸트를 통과한 플라톤’이라 할 수 있겠다. 플라톤은 칸트를 거쳐 들뢰즈에 이르러, 자신이 처음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복된다. 본질은 더 이상 가상의 원인이 아니라, 감각적 세계가 발생할 수 있는, 좋게 말해서 내재적 조건이 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사진을 다시 보자. 이 사진을 누군가 감상하고 해석할 때, 그 감상자는 사진 속에서 또 다른 감각적 경험과 인식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사진 속 어두운 그림자에서 어떤 감정을 느낀다면, 그 감정은 또 다른 드러남의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다시 새로운 생각이나 예술적 영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드러남은 또 다른 드러남을 유도하는 내재적 조건이 되며, 그 연쇄는 끝없이 이어진다. 마침내 감각적 드러남이 오히려 본질을 대신하게 된다.
들뢰즈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오! 끝까지 끌고 가는 들뢰즈. 개념세계의 분신-푸코!). 그는 ‘극화’라는 개념을 통해 이런 전복을 한층 더 밀어붙인다. 칸트의 도식론은 논리적 가능성의 영역에서 범주적 구조와 직관의 시공간적 역동성이 양립 가능하도록 보증했다. 이 말은 우리가 개념과 감각을 연결하여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중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의 인식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인 ‘감각적 직관’이고, 다른 하나는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범주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보자.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단순히 색, 형태, 크기와 같은 감각적 정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색이나 형태로만 나무를 인식하지 않는다. 그 감각적 정보는 ‘이것은 하나의 사물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한다’, ‘원인과 결과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와 같은 개념들과 연결되어야 비로소 ‘저것은 나무다’라고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감각적 직관(눈으로 본 것)과 범주적 개념(나무라는 개념)을 어떻게 연결하느냐는 것이다. 칸트는 이 연결을 ’도식(schemata)’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도식은 마치 중간다리처럼, 감각과 개념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나무라는 개념이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자라나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시공간적 틀을 통해 감각적인 나무와 연결된다. 이러한 시공간적 틀이 바로 도식이다. 그래서 도식은 범주적 개념이 구체적인 감각적 경험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를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으로 대체한다. 들뢰즈는 칸트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칸트에게는 ‘도식’이라는 중간 과정이 있어서, 감각적인 정보(나무를 보는 것)와 개념적 이해(이것은 나무다)를 연결해 주었다. 즉, 나무라는 개념이 우리의 감각적 경험과 연결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 속에서 설명되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연결을 단순히 외부적인 조건, 즉 시간과 공간 같은 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쉽게 말해, 나무라는 개념은 단순히 ‘시간 속에서 자라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외적인 조건 덕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무라는 개념 속에는 이미 ‘잠재적인 역동성’이 내재해 있어서, 이 개념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생명체를 본다고 할 때, 그것이 ‘나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나무라는 개념 안에는 이미 ‘나무로서 드러날 수 있는’ 잠재적인 움직임과 힘이 내재되어 있다(개념 안에 이미 언제나 힘의 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대상 쪽이 아니라, 개념 쪽에 이미 힘이 붙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때, 그 잠재적 힘이 현실로 드러나며 ‘아, 이것은 나무다’라는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결국 들뢰즈는 개념이 단순히 외부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개념 자체 안에 이미 현실로 드러날 수 있는 내적 역동성이 숨어 있다고 본다. 이 잠재적 역동성이야말로 개념이 현실에서 인식될 수 있도록 작동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자, 여기까지 오면 “그래, 이념의 행동학을 알겠다. 그래서 뭐?” 이렇게 냉소할 수 있다. 들뢰즈가 심심풀이로 여기까지 온게 아니지.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은 주체 구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이었다. 들뢰즈는 『경험론과 주체성』에서 정신은 주체가 아니라 “예속된 것”이라 말한다. 정신은 외부적 원리나 법칙에 의해 형성되고 구속되는 존재이다. 주체는 이러한 예속된 정신이 외부적 조건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다시 말해, 주체란 외부 세계의 충격과 사건들, 그리고 그 사건들이 내면에서 어떻게 잠재적으로 반응하고 실재화되는가에 따라 생성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나무’라는 것을 보고 경험할 때, 단순히 나무의 외형을 보는 것만으로는 ‘나무’라는 개념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자신의 경험과 감각을 통해 ‘이것이 나무다’라는 인식을 점차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 과정은 외부적 충격과 내부적 반응이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경험과 충격이 이념의 잠재성을 자극하여, 점진적으로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주체는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주체는 외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과 충격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구성된다. 어린아이가 나무를 처음 본다고 했을 때, 주체는 이미 ‘나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의 감각적 충격(나무라는 대상)과 내부의 잠재성(아직은 비구조화된 인식 가능성)이 결합되면서, 그 충격에 어떻게 반응하고, 그 경험이 어떻게 실재화되는가에 따라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체는 외부적 사건과의 충돌 속에서 ’되기(becoming)’의 과정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도식과 같은 선험적 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이 현실화되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주체는 능동적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부 사건과 내부 잠재성의 충돌과 긴장 속에서 점진적으로 ‘생성’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들뢰즈에게 주체의 탄생은 외부적 조건과 내면의 잠재적 역동성 사이의 긴장과 충돌 속에서 발생한다.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의 극화’는 이러한 외부적 사건이 주체 내부의 잠재성을 자극하여,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방식이 탄생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는 단순히 외부적 조건이 주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 내부의 잠재적 역동성이 현실적 사건과 만나면서 주체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 어디서 보던 것이다. 바로 푸코의 자기배려, 그러니까 자기와 자기의 관계라는 주체형성, 그것은 들뢰즈식이라면 애벌레 주체가 점차 구성해 가는 사유의 극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주체의 형성은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이 외부적 사건과 충돌하면서, 그 충격 속에서 ‘사유의 극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체는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내적 잠재성과 외적 충격의 만남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생한다. 이념의 잠재적 실재성은 주체가 형성될 수 있는 내적 가능성의 조건이고, 사유의 극화는 그 잠재성이 현실에서 드러나 주체로 형성되는 구체적 과정이다. 들뢰즈는 바로 이 과정을 통해 주체가 외부적 충격과 내부적 잠재성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된다고 본 것이다. 플라톤의 본질-가상의 이원론적 대립쌍은 칸트를 거쳐서 어느 순간, 푸코의 주체성 사유가 지향하는 바로 그것을 극화되어 있다.
결국 들뢰즈의 철학은 기존 철학적 이원론을 깨뜨리고, 개념과 사유, 그리고 이념의 작용을 역동적이고 내재적인 과정으로 재구성한다. 개념은 고정된 표상이 아니라, 잠재적 역동성을 통해 현실화되는 운동이며, 주체는 외부적 사건과의 충격 속에서 생성된다. 이는 단순한 철학적 재해석을 넘어서,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만들어버리는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들뢰즈는 철학적 무대를 세우고, 다양한 철학자의 개념들을 주춧돌로 삼아 자기만의 철학 공간을 구성하며, 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와 긴장을 통해 독창적인 개념의 성좌를 만들어간다. 이는 다양한 색의 실을 엮어 새로운 무늬를 직조하는 장인의 작업과도 같다. 푸코가 무사라면, 들뢰즈는 장인이다. 들뢰즈는 겨울의 철학자이다. 꽁꽁 얼어붙은 개념을 녹이고 움직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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