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 스스로를 ‘엘리트’라 자처하는 집단과 마주할 때, 때때로 깊은 분노와 좌절을 경험하게 될때가 있다. 그들은 똑똑하고 논리적이며 업무 능력도 탁월하다. 돈 계산은 정확하고, 업무의 우선순위를 철저히 따지며, 규정과 지침을 꼼꼼히 찾아 근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보고서 작성은 깔끔하고,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며, 네트워킹을 통해 상황을 능숙하게 해결한다. 모든 것이 치밀하고 계획적이며, 단 하나의 허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의 질서 속에, 그들이 짜놓은 규칙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그들의 질서에 빌붙어 살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어떤 것에 그들은 부정의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결정마저도 치밀하게 논리화하여 정당화한다. 이때 느껴지는 분노, 이른바 ‘빡침’은 단순히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이 빡침은 철저한 논리적 판단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상적 태도 속에 이미 ‘불평등한 엘리트주의’가 내재되어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는 순간, 이 분노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도덕적 인식’에서 비롯된 필연적 반응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여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능력과 논리성, 규칙 준수는 겉으로는 정의롭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들은 불평등한 시스템의 수혜자이자 유지자이며, 오히려 그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는 주체들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논리적 모순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계산된 이기적 선택을 ‘정의’로 포장하는 그들의 태도에 분노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따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버마스에 따르면 모든 의사소통은 진리, 정당성, 진정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표면적으로 ‘정당성’의 기준은 충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규칙과 절차, 논리적 설명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 내용과 의도가 ‘진정성’을 결여하고 있다면, 이는 왜곡된 의사소통이 된다. 즉, 그들은 규칙을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이를 ‘정의’라고 포장하는 기만적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다(물론 하버마스는 그 이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비판을 통해 의사 소통의 교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은 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이론은 사실상 사후적 묘사에 불과하다. 그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을지는 말해주지 않는거나 다름 없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이 기만적 의사소통의 벽 앞에서 망설인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빡침’은 이러한 왜곡된 의사소통과 기만적인 정당화 전략을 간파하는 순간 발생하는 이성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결정이 ‘진정성’ 없는 논리로 포장되고 있음을 직감할 때, 우리의 분노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가 경험하는 빡침은 ‘진정성의 결여’를 인식하고, 그것을 문제 삼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의 결과인 것이다.

문제는 공동체에서 법적 정의와 형식적 절차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결정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결국 자신들의 이익과 지위 유지를 위해 철저히 계산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욱 격렬한 분노를 느낀다. 특히 누군가 그들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거나, 심지어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이 분노는 배가된다. 왜냐하면 그 정당화 속에는 이미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기득권을 다시 절차적 정당성 속에서 물타기를하려는 듯 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도덕적 논리에서 보자면, 오히려 그들이 비논리적인 것이다.

이 빡침은 결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가 외면당하고, 불평등이 교묘하게 논리화되며, 억울함이 구조적으로 고착될 때 느끼는 일종의 ‘도덕적 분노’다. 우리는 그런 순간, 자신의 감정이 오히려 더 논리적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분노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엘리트주의적 불평등의 실체를 꿰뚫는 통찰일 수 있으며, 오히려 사회적 정의를 요구하는 가장 본질적인 감정적 반응일 것이다.

우리는 그 정의가 단지 규칙과 절차,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정의는 결국 어떤 사회적 가치와 인식, 윤리적 직관을 따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빡침은 바로 그 윤리적 직관이 배신당한 순간의 감각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논리적이며, 사회적 감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빡침은 억제되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를 더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주목해야 할 이성적이고 정당한 반응이다.

아마 리플리라는 소설에서 리플리가 디키에게 느낀 감정도 이런 빡침이 아니었을까? 리플리는 디키의 세계에 들어가려 애썼고, 디키의 네트워크에 빌붙어 살려 했다. 그러나 그 세계는 끝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리플리의 행위는 자신이 그들 사이에 기만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간파한 순간의 ‘이성적 빡침’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혁명적 행위’는 이 이성적 빡침의 순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초험적 윤리의 순간. 리플리적인, 너무나 리플리적인 순간, 이성은 초험적 윤리의 순간을 맞이 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