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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토론은 학술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지만, 정작 그 비판이 본래 대상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항상 의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비판의 허점을 찾아내 보다 세밀하게 문헌적 근거를 보완하거나, 그 비판이 부실하다는 점을 폭로하려 한다. 특히 푸코처럼 방대한 사유 체계를 구축한 철학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말과 사물』을 예로 들어보자. 근대철학들, 칸트, 메를로 퐁티, 후설, 하이데거에 대한 푸코의 비판들을 샅샅이 찾아서 종종 개별 문장 하나하나를 끄집어내며 특정한 논지가 허술하다거나, 문헌적 근거가 부족하고 단순한 부정이나 단언에 머문다고 지적하곤 한다. 나도 그런 증거나 비판들을 읽으면 사실이 그러하다고 여길 때가 있다. 푸코는 거의 모든 책에서 학술적 근거 달기에 아주 취약한 사람이다. 그의 각주는 학술적 논문보다 관공서의 문서들이나 비철학적 고문서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궁극적으로 겨냥하는 근대 철학의 ‘인간학적 사유’의 해체라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관심은 단순한 개별 명제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 이후 철학이 형성한 인간 중심적 사고 방식이 어떻게 자리 잡고 변형되었으며(칸트가 후설과 하이데거로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 그 구조 자체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해체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말과 사물』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읽히고 성찰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이 ‘완벽한 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 속에서 제기된 근대적 사유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문제 제기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적 텍스트를 비판할 때 중요한 것은 그 텍스트가 가진 학문적 허점(사실 이것도 굉장히 문제가 많은 말이다. 무엇이 학문적이란 말인가)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단순한 논리적 결함이나 문헌적 근거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구조와 그것이 도달하려는 지점을 제대로 쫒아가야 한다. 만약 비판이 그 핵심적인 논점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그 철학이 도달하고자 하는 자리를 보지 못한다면, 그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 단지 지식을 떠벌이는 자위행위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사정의 입장에서, 다시 글을 쓰는 자들에게 돌아와 가져보는 중요한 마음가짐은 비판을 의식하여 문헌적 근거에 집착하거나, 논리적 결함을 꿰메는 데 모든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단순한 비판적 논쟁을 넘어, 자신의 철학이 도달하는 지점, 즉 비판자조차 따라가지 못하는, 아니, 비판이 무화되는 어떤 지점에까지 다다르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문헌적 근거나 논리적 결함의 허술함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철학적 논의는 단순한 반박과 논증의 싸움을 넘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말과 사물』을 통해 보여준 것은, 철학이 단순히 ‘진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 자체를 역사적, 구조적으로 성찰할 때만이 비로소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점이었다. 그 ‘열림’ 아래에서는 문헌적 부족함이나 논리적 결함은 잊혀지고,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비판이 무화되는 자리까지 사유를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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