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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가야 신이치로와 고쿠분 고이치로, 『책임과 생성』

책을 읽다가 장애운동의 변화와 관련한 짧은 대목을 읽었다. 저자는 무심히 서술하고 있는데,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 들었다. 저자 말로는 1980년대에 근거기반의학(EBM)과 당사자 운동이 결합하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고 한다. 연구를 통해 기존의 재활 방법 중 많은 것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통계적 방법으로 밝혀졌고, 의료적 개입의 한계가 드러났다. 동시에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소수 인종 등이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며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결과, 장애를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로 보는 사회적 모델이 정착된다.

내가 보기에 여기에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이점이 드러나는 운동의 경로가 내포되어 있다. 통계학적 근거기반의학과 당사자 운동,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식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당사자 운동 없이 통계학적 근거만 있었다면, 여전히 긍정적인 통계적 결과를 찾아가며 새로운 재활 방식만을 모색했을 것이다. 반대로 당사자 운동만 있고 통계적 근거가 없었다면, 장애인들의 운동은 타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을 것이며, 심지어 당사자들조차 운동의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해 곧 사그라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파적인 방법론인 통계학과 좌파적인 운동이 결합하여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도구를 소수자들이 전유하고, 그 전유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운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좌파 운동이 우파의 도구로부터 생성된다고 늘 생각해 왔다. 우리가 고민하는 모든 것은 이미 우리 눈앞에 존재하며, 모든 변화의 출발은 보편적인 이데올로기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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