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책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글에서 간단한 서평을 써두었습니다. 👉주체의 변형, 삶-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
나는 오늘부터 윤영광 선생님의 <칸트와 푸코>를 읽기 시작했는데, 초반부에 무척 반가운 장면을 발견했다. 순간 발심이랄까, 충동이랄까, 하는 이상한 감흥이 들어 간단히 메모해 두려고 한다. 오래전 <차이와 반복> 세미나를 할 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이 부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혼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하루 종일 상기된 채로 지냈다. 나는 주체론의 측면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는다면, 들뢰즈가 칸트의 주체론에 균열을 찾아내는 이 장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윤영광 선생이 이 이야기를 끌어와 주니 반갑기 그지없다.
칸트 철학에서 주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경험하는 현상적 자아(수동적 자아)와,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주체(나는 생각한다)로 분열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 분열은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며, 주체는 자기 자신을 항상 타자처럼 경험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라는 방식으로 아주 절묘하게 ‘분열된 자아를 위한 코키토’(<차이와 반복>)를 창조해낸다. 즉, 현상적 자아의 관점에서 보면 초월적 주체는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하나의 타자처럼 나타난다. 칸트적 주체는 단일한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좀 쉽게 예를 들어 보겠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보면, 우리는 “아, 저 사람이 나구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내가 아니라, 반사된 이미지(현상적 자아)일 뿐이다. 즉, 나는 거울 속에 있는 나를 직접 만질 수도 없고, 그 속의 나를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거울 속의 존재를 통해 나 자신을 “인식”(이 단어를 쓰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라!)하고, “저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주체의 분열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자아’(거울 속의 나, 현상적 자아)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사실은 진짜 ‘나’ 자체가 아니다. 반면, 우리의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주체(거울을 보고 있는 나)는 인식의 근거가 되지만, 그것 자체를 직접 인식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의식”(!)하고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마치 타자인 것처럼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거울 속의 나’를 통해서만 ‘나’를 알 수 있으며, 진짜 ‘나’는 직접 다가갈 수 없는 무언가로 남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주체의 분열을 정확히 서술했지만, 그 자체를 정신분열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를 오히려 근본적인 분열 상태로 해석하고 있다. 아니, 칸트를 발가벗겨서 새로운 옷으로 바꾸어 입히고 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 지점에서부터 칸트에게 온갖 ‘불온한 사유’의 세력들이 달라붙는다. 들뢰즈뿐만 아니라 네그리, 지젝 등 여러 현대 철학자들이 바로 이 균열에서 칸트를 들쳐 업고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한다. <차이와 반복>은 다시 주체의 철학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윤영광 선생님의 시각은 나에게 오랫동안 푸코와 들뢰즈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시각과 맞닿아 있다. 20~30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는데도, 앞으로의 내용이 더욱 기대된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그런 방향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잘 아는 분들에게는 뭘 이런 걸로 감흥을….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푸코의 자기배려 탐구에 빠졌던 단초이기도 해서 간단히 메모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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