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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데리다는 늘 전통을 중시한다. 어떤 철학적 행위나 경험적 행위를 할 때마다 이에 대한 철저한 기록과 평가를 통해 이전의 전통을 갱신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이런 사고는 말 그대로 상식적인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가 상식적인 주장을 펼치는 방식을 그의 복잡한 서술 구조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내가 보기에 이는 우리에게 승계되어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지 모를 ‘이원적 사고방식’(어쩌면 전통이라는 것 자체가 이런 이원구조일지도)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에 대한 그의 철학적 싸움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원적인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음성이냐 문자냐, 기의냐 기표냐, 정신이냐 육체냐, 존재냐 비존재냐 등등) 우리는 두 요소 중 하나를 우위에 두고 선택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전개하는 것이 더 편안하다. 또는 이 이원구조를 극복하거나 회피하기 위해 초월적인 대상을 상정하고(신, 도, 자연 등등), 그 존재를 통해 양자를 통합하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국 이원구조의 반복에 갇히거나, 마치 이를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회피하는 방식에 불과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이원구조 바깥에서 사고할 수 있는 개념을 손에 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새로운 사유를 시도하더라도 기존의 이원구조 속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우리는 그 구조 안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실존이 이미 그 구조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벗어나려 하더라도 기존 개념과 수단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이원구조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그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걸 어떻게 벗어난단 말일까.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딜레마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TLP 6.54) 이는 <장자>의 “토끼를 잡으면 덫을 잊고,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라는 말과도 통한다. 통발(罃)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도구이지만, 물고기를 잡고 나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어느 단계의 철학적 도구(개념이나 논리)도 다른 단계에 도달하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그 단계에 도달하면 결국 버려야 한다.

나는 이러한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계단을 부수는” 전략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 대표적인 철학자가 바로 데리다라고 생각해 왔다. 그 유명한 “경첩의 이중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해체(Deconstruction)는 기존 철학을 비판하는 도구로서 ‘그라마톨로지(문자 중심 연구)’를 활용하지만, 그라마톨로지 역시 또 하나의 이원구조(문자가 음성을 대신하는 또 다른 중심주의)이므로 결국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는 그라마톨로지와 ‘경첩(hinge)’처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과하려는 관계에 있다. 경첩이 문과 문틀을 연결하지만, 문이 열리고 닫힐 때 독립적으로 움직이듯이, 해체도 그라마톨로지를 기반으로 하면서도(즉, 이전 단계의 개념적 도구) 결국 그것을 해체하는 이중적인 관계를 가진다. 아마도 데리다의 난해한 문장은 이러한 이중적 관계를 표현하기 위한 고통, 그리고 그것을 돌파하려는 전투의 ‘흔적’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조건적 환대와 절대적 환대가 서로 필연적으로 충돌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끊임없이 설명한다. 조건적 환대는 법과 제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행되지만(이때 신원 확인 같은 법적 조건이 달라 붙는다), 이는 결국 환대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며(심지어 환대가 배제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절대적 환대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반면 절대적 환대는 신원 확인이나 법적 조건 없이 모든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이를 현실에서 실행하면 공동체의 질서와 안정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 즉, 절대적 환대를 실현하려 할수록 오히려 환대가 제한될 수밖에 없고, 절대적 환대가 없으면 환대는 배제를 위한 행정적 치안 조치로 전락하고 만다. 따라서 환대는 단순한 개방과 배제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 법과 이상적 원칙이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형되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딜레마적 구조를 가진다. 조건적 환대와 절대적 환대 조차 데리다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문제 삼으며, 늘 돌파하려고 했던 ‘이원적 구조’의 또다른 형태인 것 같다(이 두 환대를 이원적 구조로 볼 수 있느냐?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데리다의 반복강박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나는 이 책을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읽었다. 오래전에 이 책을 남수인 번역본으로 읽었을 때, 데리다가 단지 환대가 조건적 환대에 머무르면 오히려 환대의 본질적 의미를 퇴색시키고 배제의 구조를 고착화시키기 때문에 절대적 환대의 가능성을 환기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 정도로도 그는 시대적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고 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데리다가 더 깊은 차원에서 전투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조건적 환대와 절대적 환대의 이원적 구조, 그리고 우리가 그 구조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해체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돌파해 나가려는 시도에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깨닫는다. 특히 예전에 읽었을 때는 단순히 수사적인 장치로만 보였던 ‘오이디푸스’에 대한 데리다의 섬세한 ‘해체’가, 그리고 마지막에 롯기에 나오는 절대적 환대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에는 단순한 비평을 넘어 그야말로 데리다의 탈구축적 독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닫고 감탄하게 된다.

데리다는 오이디푸스를 “법-바깥의 존재(anomos)”로 규정하면서, 그의 죽음과 매장이 환대와 배제의 이중적 구조를 드러낸다고 본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서 추방된 이방인이지만, 그의 죽음과 무덤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때 테베의 안녕이 보장된다는 신탁이 있다(오이디푸스가 만든 신탁이다). 즉, 그는 단순히 배제된 자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남겨진 자들에게 특정한 법적·윤리적 질서를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고 비밀로 유지됨으로써, 그는 특정한 장소나 기억 속에 고정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이는 환대가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받아들임 속에 이미 배제와 경계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딸들에게 자신을 기억하도록 함으로써 환대에 열려 있지만, 자신의 무덤을 알리지 않아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딸들의 애도는 계속 지연되는 방식으로 배제된다.

데리다는 오이디푸스의 무덤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때 테베가 안정될 것이라는 믿음이, 권력과 법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죽어서도 여전히 법을 만들고, 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되며, 이 과정에서 테세우스 같은 통치자는 그의 법을 수호해야 하는 “인질”이 된다(테세우스는 오이디푸스의 비밀을 지켜야 하므로). 즉, 권력자는 단순히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맥락 속에서 법과 질서에 의해 포획되는 존재이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반복되며, 통치자는 인민의 요구와 역사적 전통, 국제적 규범 등에 의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 구조 속에 놓이게 된다. 결국, 법과 권력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갱신되는 것이다. 통치자는 오이디푸스의 비밀, 즉 법 자체(le lois)의 인질이다.

이 지점에 오면, 절대적 환대는 법 자체(le loi)로서 이방인과 인민이 통치자를 ‘인질’로 만들어내면서 조건적 환대로서의 현실적인 법들(les lois)을 견인하는 운동 그 자체를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여기서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되고 있다. 칸트의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은 현실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는 없지만, 인간이 따라야 할 하나의 이상적인 기준을 제공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완전한 정의”나 “영구 평화”는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될 수 없지만, 그 개념이 있기에 사회는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 노력한다. 규제적 이념은 고정된 이상적인 원칙으로서, 현실에서 그것을 달성할 수 없더라도 우리가 행동을 조정하는 기준점 역할을 한다. 칸트의 경우, 이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으로 존재하며,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가 변화해가면서 직접 현실에 개입해서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은 아니다(글쎄, 그런 동력으로서 운동하는 이념이란 개념이 가능하다면 모를까, 칸트는 그런 운동하는 개념으로서 이념을 설정한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환기하는 이상적 원칙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는 단순한 이상적 기준이 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변형하고 재구성하는 운동 그 자체이다.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를 하나의 법 자체(la loi)로 보며, 이는 조건적 환대로서의 현실적인 법들(les lois)을 견인하고 도전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특히, 그는 환대의 관계에서 이방인과 인민이 통치자를 “인질”로 만들면서, 기존의 법과 질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도록 강제한다고 본다. 이 점에서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칸트의 규제적 이념이 고정된 이상적인 기준이라면,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는 현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힘과 과정이다. 즉, 데리다는 절대적 환대를 단순한 원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 정치적·사회적 운동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현실에 개입하는 운동으로서 절대적 환대.

그러나 데리다는 이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에 아주 중대한 이야기로 자신의 사유를 갑자기 멈춘다. 아니, 사유를 더 넓은 지대로 열어 놓는다. 바로 성서에 나온 롯의 환대 이야기이다. 이 텍스트에서 환대는 단순히 손님을 맞이하는 행위가 아니라, 배제와 희생을 통해 유지되는 폭력적인 질서로 나타난다. 환대의 주체인 집주인 롯은 자신의 손님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딸과 종을 “발송물”처럼 제공한다. 이는 환대의 법이 단순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 질서(여기서는 가부장적인 질서) 안에서의 희생을 통해 지속되는 체계라는 점을 드러낸다. 환대의 권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공동체의 어느 부분은 언제든지 희생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며, 이 희생을 통해 환대는 지속된다. 절대적 환대의 현실 개입은 결코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폭력과 희생 속에서 현실에 개입하고 있다.

이러한 희생의 논리는 “발송물”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이 협상과 폭력의 매개체로 “발송”되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환대의 법을 유지하기 위한 대상으로 기능한다. 여성의 시체가 새벽이 되어 버려진 채 발견된다. 그리고 여성은 단순히 희생당한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신이 다시 “발송물”로서 열두 조각으로 나뉘어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에 전달된다. 이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환대의 법을 강화하고 사회적 규범을 재확립하는 의례적 행위로 작동한다. 다시 말해, 환대의 법은 이방인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근본적인 배제와 희생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기존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환대의 법이 단순한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기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정치적, 가부장적, 권력적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환대는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누군가를 인질로 삼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유지되는 구조적 폭력의 일부이다. 발송물의 개념을 적극 활용한다면, 환대의 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항상 희생될 “발송물”이 필요하며, 이 발송이야말로 환대가 지속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즉, 환대는 절대적 환대와 조건적 환대 사이의 딜레마 속에서, 희생과 배제라는 모순적 요소를 통해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이율배반적 구조로 드러난다.

이것은 무엇인가? 절대적 환대의 폭력적 구조는 현실에 개입하여 환대가 이루어지게 만들지만, 이 절대적 환대의 폭력적 흔적은 다시 공동체에 남아서 그 공동체가 유지되고 지속되는데 기여한다. 희생자-발송물은 통치자-인질로 바뀌어 있다. 어찌보면, 바뀌었으나 바뀌지 않았고, 바뀌지 않았으나 바뀌었다. 계단을 타고 올라갔지만, 계단은 지워져 버렸다. 그러나 다시 앞에는 피로 물든 계단이 놓여 있다. 여전히 새로운 구조에 갇히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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