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타자다 : 브랜드화되지 않는 글쓰기
훌륭한 글을 세상에 내놓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겠다는 자아가 없는 글쟁이가 과연 있을까. 물론 이러한 의식 자체가 근대적인 자의식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자기 자신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사실, 거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점을 굳이 숨기지 말자.)
독서 행위는 이러한 자기 브랜드화 과정에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특정 분야의 전문가 혹은 주목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하려면, 그 분야의 필독서를 읽고, 독서 경험을 SNS에 공유하며, 자신의 독서 이력을 통해 차별화된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해질 수 있다. 이제 책은 단순한 학습 도구를 넘어, 자기 홍보와 사회적 입지를 구축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수의 친구들과만 글을 공유하면서도 진지하게 글의 진보를 이루고자 한다면, 되도록 사람들이 읽지 않을 책을 찾아내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사유를 탐구하며, 오로지 자기 자신의 충족을 위해 글을 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그 글은 더 이상 ‘브랜드’가 될 수 없다. 쉽게 읽히지 않는 글, 간단히 이해될 수 없는 사유, 몇 마디로 공유될 수 없는 통찰이야말로 반(反)-브랜드적인 글쓰기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면,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브랜드화된 자아와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그렇게 읽고 이해해줄 친구들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결국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글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게 되는 걸까?
결국 이 자리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면, 글을 ‘타자’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을 단순한 자기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나와 분리된 존재이자 독립적인 생명을 지닌 무엇(사실, 그것이 ‘생명’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지만—비생명적인 타자이면서도 대화가 가능한 존재로서, 글만이 유일한 그런 것이 아닐까)을 상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글과 대화하고, 글과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이 공동체는 독자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글 자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즉, 사회적 인정이나 독자의 반응이 아니라, 글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과 내가 그것에 응답하는 과정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글쓰기는 곧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 다시 말해, 이 ‘고독한 공동체’에서 글은 나의 타자이자 유일한 대화 상대가 되고, 나는 그것을 통해 세상과 접속한다.
이러한 태도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브랜드화되지 않은 글쓰기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의 글쓰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글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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