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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 『글자를 옮기는 사람』 / 『변신』

공원에 앉아 노인들의 움직임을 볼 때면 팔과 다리 사이로 문장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생기곤 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 사이로 정신이 문장으로 흘러내려서 곧 육신의 물질도 따라서 녹아버리고 말 거라는 착각. 나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아이들, 아니 아기들보다 더 순수한 상태에 다다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과 육신이라는 등장인물이 드디어 모든 역할을 끝내고 무대 밖으로 빠져 나가려 한다고.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그들이 말하는 말은 의미를 가진 말이라기보다, 육신의 부스러기, 혹은 육신의 진물이 흘러 내리는 것 같이 무의미한 물질들이다. 아마도 가장 순수한 결정체일지도 모를 순수물질. 지금쯤은 내보내야만 하는 나무의 진액 같은. 마지막으로 정신들을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듯한 안간힘. 아, 그렇구나. 모든 문자는 의미 생성과 더불어 죽는거구나. 사라지는거구나. 물론 저 물질들은 다른 것들과 결합되어 다르게 존재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다와다 요코는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인식한다. 표음문자는 음성을 기호화한 것이기 때문에 단어 자체가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소리를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 반면, 표의문자는 글자 자체가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시각적으로 개념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런 근본적인 차이는 번역을 통해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발생시킨다. 요코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가지고 소녀의 얼굴에 태양의 빛이 비치는 장면을 설명하면서, 특히 일본어에서 ‘얼굴’을 의미하는 글자들(面, 表 , 오모おも’ ‘오모테おもて’, ‘멘めん”로 발음) 안에 태양을 의미하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멘 面에는 태양의 의미는 없는데, 아마도 오모테 表가 衣(옷)과 日(해, 태양)로 분해되니까, 그렇게 분석하는 모양이다. 아무튼 카프카가 이러한 표의문자들을 실제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요코는 표음문자를 표의문자로 번역할 때, 이런 예상치못한 문자상의 연결고리가 생기면서, 원본과 번역 사이에 돌발적인 사건이 생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다와다 요코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전 공원에서 노인들의 팔과 다리 사이로 문자가 흘러내리는 착시를 다시 느꼈다. 표음문자는 의미 없이 소리만을 전달하지만, 표의문자는 글자 자체가 의미를 품는다. 표음문자는 단어 그 자체로는 정신을 좀처럼 현출(顯出)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표의문자의 시각적 구성요소 속으로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의미의 연쇄가 발생하면서, 물질(음성을 모방한 문자물질)에 깃들어 있던 정신들이 흘러내려서 물질 밖으로 돌발적으로 현출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어(표의문자)를 독일어(표음문자)로 번역할 때는 반대의 현상이 발생할 것이다. 아마도 과잉된 의미들을 지닌 표의문자를 단일한 물질의 형태를 고수하는 표음문자의 담 안으로 꾸깃꾸깃 집어넣는 어려움 같은 것 말이다.

그러고보면 표음이든 표의든 모든 문자는 물질적이며 신체적이다. 얼굴 표정처럼 속마음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그것들은 온갖 다양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신체들이다. 서로 다른 표현방식을 가지고 있는 신체인 이들은 마치 신체가 죽음을 맞이하듯, 사용되어지고 나면 그때의 의미와 함께 사라진다. 이제 다시 다른 신체들과 결합하면서 다른 의미로 살아나기도 하고, 전혀 의미를 얻지 못해서 자연의 돌무더기처럼 무의미하게 지속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가도 물이 흘러가듯이 다른 어떤 손길을 만나서 옮겨지면, 즉 번역되어 다른 시공간으로 움직이면 아주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져 새로이 살아가기도 한다. 요코는 문자텍스트 자체는 파편적인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물이 흘러 여러 시공간을 거치듯이 번역을 통해서 다양한 존재로 변신해 가는 모습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물의 이미지는 요코에게 결정적인 것 같다. 요코는 처음에 좋은 번역은 출발어를 도착어로 무사히 옮기는 과정으로, 다리를 통해 장애물을 넘어 한 강가에서 다른 강가로 건너는 것에 비유한다. 아마 모든 번역가의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되면서 번역가인 주인공은 자신의 주장과 달리 점점 물과 직접 접촉한다. 번역이 잘되지 않을 때 양동이에 물을 받아 등을 식히거나, 메마른 강에서 발이 젖는 환상적인 경험을 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특히 물 없는 강에서 신발이 젖고, 신발을 털자 마른 돌멩이가 쏟아지는 장면은 번역 과정이 단순한 언어적 이동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변형과 충돌을 동반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다.“나는 건너편 강변을 향해 돌을 계속 던졌다. 강에는 물이 없었으나 발이 젖어서 차가웠다. 건너편 강변에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내가 던진 돌을 줍더니 파란색 반투명 비닐봉지에 담아 모았다. 내가 발을 움직일 때마다 신발 속에서 참방참방 물소리가 들려 거치적거렸다. 물을 꺼리진 않지만 소리가 시끄러워서 주의가 영 산만했다. 신물을 벗어 거꾸로 해서 흔들어 봤다. 그랬더니 속에서 마른 돌멩이들이 후두두 떨어졌다.”(<글자를 옮기는 사람> 48-49). 여기서 물은 번역의 예측불가능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번역이 늘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불성실한 행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번역된 언어는 원래의 의미를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망나니처럼 변화하기만 한다. 이는 요코가 잠시 머무는 집 옆에 있는 바나나의 성장 과정과 닮아 있다. 바나나는 원산지를 떠나 다양한 지역에서 재배되고, 토양과 기후에 따라 맛과 형태가 달라진다. 이처럼 언어도 번역을 통해 원래의 의미가 변형되며, 특정한 문화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적 존재가 된다. 번역이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문화적 지배, 변형, 그리고 새로운 의미의 창출과 얽혀 있다. 염소가 문서를 먹어 치우듯(주인공이 번역하는 섬에는 염소가 많다),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보존하기보다 새로운 맥락 속에서 왜곡시키거나 소멸시키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번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번역의 언어는 원어에도 속하지 않고, 번역어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의 존재이다. 번역의 이동성과 유동성은 번역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타인의 언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번역자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번역의 불가능성이 드러난다. 번역 불가능성이 곧 번역의 예측불가능성으로, 그리고 그것이 곧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것이다. 이런 묘한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던 위대한 작가는 바로 카프카였다. 요코는 카프카를 동아시아인으로서 해석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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