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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나는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사유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단순히 “생각한다”는 것과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개념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유를 사유한다”는 것은 사유가 가능해지는 조건과 구조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자료의 연쇄를 정리하는 것일 뿐이지만, 후자는 그 자료들이 나오는 조건 그 자체를 사유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유란 자료 이전의 모습을 생각해내려는 분투이다. 사유는 그렇게 자료 이전에 단독적일때만 사유이다.

그런데 특정한 사유가 단독성을 유지하려면, 어쩌면 시간이라는 범주로 해석되는 것을 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마 역사학이라면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역사학은 자료의 연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학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문학사에서 ‘18세기 조선 문체’가 특정한 시대적 흐름이나 사회적 조건의 결과로 설명될 수도 있다. 즉, “18세기 조선 문체는 사회적 변동이 많이 생기고, 상업과 도시 경제가 성장하면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게 됨으로써 감각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문체가 생성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순간, 18세기 조선 문체는 단독적인 사유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자료들의 하나의 결과로 해석되고 만다. 그 문체 속에 남겨진 사유들은 사라져 버린다. 나는 이런 해석을 거부하고 오직 그것이 사유되는 방식, 여기서는 18세기 조선 문체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사유의 단독성을 탐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야 그 시대의 사유가 가지고 있는 논리적 구조, 그리고 그 시대가 가지는 합리성의 아름다움을 진정 나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볼때 문학사에서 나는 시간을 사유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고 싶지 않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유를 이해하는 방식(헤겔처럼 “시간이 사유를 결정한다”는 관점)을 거부하고, 사유는 오직 그 자체로 작용하는 특정한 시공간에 단독적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문학은 “시간에 따라 발전한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예컨대 18세기 조선 후기의 문체는 조선 후기의 비주류들의 서울이라는 실재하는 장소에서 이루어진 단독적인 사유 결과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8세기의 문학처럼 사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유가 가능해지기 위한 어떤 언표나 개념적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18세기 문학 만의 아름다움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랬을때 “한국 문학”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서 진정으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중국의 아류이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단독적 사유로서의 18세기 말이다.

나는 이런 태도로 모든 한국 문학의 어느 시대든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시간의 흐름이나 연쇄적인 영향 관계도를 벗어나서 그 시대 그 순간의 사유 그 자체를 구조화하고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사의 중요한 임무가 아닌가.

해모수와 세 자매(유화, 훤화, 위화)의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적 전설을 넘어 고유한 미학적 깊이를 갖춘다. 특히 세 자매의 이름이 각각 자연 속의 꽃과 연관되어 있는 점은 이 서사가 단순한 권력 투쟁이나 출생 설화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된 미적 구조를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 신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별한 아름다움이다.

향가는 단순한 종교적 노래가 아니라 신라라는 공간에서 형성된 단독적인 사유의 결과이다. 향찰을 이용한 표기 방식, 종교적 색채를 띠면서도 당대의 서정성과 현실성을 담고 있는 점은 중국이나 일본의 문학과 다른 한국 문학만의 독창성을 보여준다. 향가는 종교의 외피를 두른 현실주의자들의 미감 넘치는 언어이다.

최치원의 대표적인 작품인 <사산비명>은 단순한 비문이 아니라, 불교적 사유와 유학적 논리를 통과하며 신라 사유의 단독성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그는 유불회통의 관점을 바탕으로 유교와 불교의 가치를 가로지르려고 했다. 이것은 신라라는 시공간이 아니면 형성되지 못할 일이다.

허균의 사유가 조선에서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개혁론이 아니라 기존 사회의 근본적인 사유 방식을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성리학적 세계관 속에서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타고난 위계질서를 따라야 했지만, 허균은 이탁오처럼 기존 질서를 부정하며(허균이 양명학에 경도되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유를 강조한다. 그의 홍길동전은 단순한 영웅담이 아니라, 질서를 전복하려는 문학적 실험이다.

홍대용의 평등 사상은 인간 내부의 신분 문제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까지 확장된다. 홍대용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적 특징은 그의 평등 사상이다. 그의 ‘균(均)’ 개념은 단순한 휴머니즘을 넘어서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평등 사상에서는 주체가 일방적일 수 없으며, 객체가 복원된다는 특징이 있다⁠. 객체지향 유물론 같은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이언진의 시세계는 단순히 현실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시도한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기존의 한문 문학 전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백화(白話)와 속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형식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적 표현을 추구한다. <호동거실>은 말년의 문학으로서의 면모를 짙게 보여 줘, 자기 응시라든가 고통에 대한 관조라든가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데, 시가 보여주는 내면이 심상치 않다. “서산에 뉘엿뉘엿 해 넘어갈 때 나는 늘 이때면 울고 싶어요.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어서 저녁밥 먹자고 재촉하지만.”

최치원, 이규보, 김시습, 황진이, 허균, 이언진, 박지원 등등은 사유를 담지하고 있는 주체들은 시간을 지녔지만, 그들을 통해 솟아난 사유들은 시간을 벗어나 단독적인 아름다움를 지녔다. 이 아름다움들을 어찌해야 할까. 그저 자료들의 연쇄 속에서 분석되어 칼질되고 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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