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주인이 아니다
철학책은 어렵다. 중요한 원전들은 대부분 유럽과 미국의 저작을 번역한 것이기에, 번역어가 어색하거나 문장이 꼬여 있으면 읽기가 더욱 난해해진다. 그래서 원전이든 영어 번역본이든, 참고할 만한 자료가 있으면 함께 놓고 읽게 마련이다. 예전에 고(故) 박성관 선생님은 꼼꼼하게 읽어야 할 책이라면 원서, 영어 번역본, 일본어 번역본 세 가지를 나란히 두고, 중요한 대목은 대조해 가며 읽었다고 말했다. 영어는 내게 편안한 외국어이기 때문에, 일본어는 동아시아인인 내게 감각적으로 더 이해하기 편안한 외국어이기 때문에, 세 개의 언어를 동시에 보면 좋다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 애를 써보았지만, 내 능력으로는 부족해서 완전히 따라해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언젠가 나는 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단순히 능력의 차이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능력의 한계가 독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바로, 내가 책과 저자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깨닫게 된 계기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을 때였다. 번역이 아주 나쁘지는 않았음에도, 처음에는 이 책의 유명세와 푸코라는 저자에 대한 일종의 숭배심 때문에 읽기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책을 읽는 것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결국 그 책을 한동안 덮어두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푸코의 다른 저작들을 모두 읽고 나서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푸코를 존중하지만, 이 책의 절반은 푸코 자신도 잘 모르고 쓴 내용일 거야. 그렇게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읽어나가자,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물론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당연히 푸코가 자신의 책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썼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저자에 대한 숭배심을 내려놓고, 그를 나와 대등한 존재로 바라보려 노력하자, 신기하게도 저자의 권위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푸코 자신도 본인이 쓴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책의 진정한 의미를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푸코가 말했던 “저자는 텍스트의 생산자이지,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저자란 무엇인가」에 나온 문장일텐데, 정확한 문구는 찾아보지 않았다)라는 문장과 맞닿아 있는 경험이 아닐까? 독자가 저자를 절대화하는 순간, 텍스트는 더 이상 제대로 이해할 여지를, 심지어 자유롭게 사유할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서할 때 저자를 우상화하는 태도는 오히려 푸코의 사유 방식과 정면으로 어긋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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