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프리커, 『인식적 부정의』
고쿠분 고이치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오늘 책을 두 권 샀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사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번이 2월의 구매다. 점심시간에 서둘러 서론만 읽어보았다. 그중 한 권은 “인식적 부정의”다. 예전에 어떤 철학 토론 장소에서 내가 해석과 주장을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같은 내용을 더 잘 알려진 유명 발표자가 말할 때보다 덜 신뢰하거나, 심지어 그 발표자가 내 의견과 동일한 말을 반복했을 때 더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책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식적 부정의”, 구체적으로는 “증언적 부정의”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마도 흑인이나 여성이 발언하거나 능력을 보여줄 때 나타나는 편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지방대를 나와 늘 학벌에 짓눌렸던 나는, 평생 이런 의심 속에서 상대들과 만나왔는데, 어쩌면 이 설명 속에서 배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학벌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또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증언적 부정의와 정확히 부합하는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책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이다. 김상운 선생이 번역했고,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이어서 바로 구매했다. 책 앞에는 스피노자의 말이 제사처럼 붙어 있다. “할 수 있는 한 사물들을 활용하고 그것들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태도다.” 이는 인간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향유하며, 자신을 실현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코나투스와 기쁨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서론에는 은퇴한 남성들이 필사적으로 TV 프로그램의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이것을, 그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몸부림으로 해석했다. 오랫동안 사회에 기여했지만 이제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이들이, 특정한 방식—노래를 통한 공감과 연대—으로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제사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삶을 긍정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실된 의미를 애써 되찾으려는 몸짓에 가깝다. 고이치로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튼, 아직 본격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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