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나는 현대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헤겔과 스피노자가 좌파 내 양대 깃발 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 있다. 처음에는 내게 이 두 개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옷차림에 비유하자면, 헤겔이 컬러감 없이 기름이 잔뜩 묻은 공장 작업복 같다면, 스피노자는 하얀 면티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편의점 작업복 같달까. 헤겔은 마르크스와 소비에트와 중화인민공화국의 고난을 함께 한 권위있는 철학자이고, 스피노자는 뭔가 존재감은 없지만 조용히 이곳저곳에서 홀로 애쓰는 안쓰러운 철학자 같았다. 당연히 서로 마음이 맞을 리가 없어 21세기에 공부한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내가 헤겔을 읽는다고 하면 “헤겔? 하필이면 그렇게 낡고 고루한 사고를 공부해야 하나요. 아니 몇 달이나 잡고 그것을 읽고 있다고요? 이런 쯧쯧, 당신도 어진간히 별나군요”라는 말을 한다. 이 사람들에게 헤겔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권위주의와 몰락의 대명사 같은 것이다. 또 반대로 헤겔을 공부하던 7-80년대 정통주의자들(?)은 혹여나 해서 들뢰즈의 스피노자, 알튀세르의 스피노자를 공부해보겠노라고 세미나에 들어왔다가도 혁명은 고사하고 소수자, 다수성 등등 귀퉁이의 소곤거리는 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들뢰즈, 알튀세르, 스피노자를 싸잡아 비난하곤 한다.
그러나 19세기 헤겔의 시대로 돌아가서, 헤겔의 자리에 서면 그 둘이 그렇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심지어 헤겔 자신은 스피노자를 끊임없이 사유했다. 이 책 <헤겔 또는 스피노자>을 읽으면, 헤겔이 스피노자가 없이 어떻게 헤겔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사유를 철학의 출발로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철학과 구분하며 스피노자를 끊임없이 소환해 논박한다. 스피노자 학설의 불충분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헤겔은 스피노자의 것이 아닐뿐더러, 헤겔 자신과 양립할 수 없는 추상적 인식관에 속하기 때문에 그가 명시적으로 거리를 두었던 몇 가지 철학적 입장들을 스피노자에게 마구잡이로 전가한다. 더 이상한 것은 헤겔이 스피노자가 이미 데카르트주의자에게 맞서 전개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논변을 스피노자에게 맞서 부당하게 제시한다는 점이다. 헤겔 안에는 헤겔 자신과 스피노자 간에 대립시키면서 오인시키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존재한다. 그래서 마슈레는 ‘헤겔 또는 스피노자’라고 묘한 이름을 붙이는데, 이들은 둘로 분할되는 하나다.
예컨대 헤겔이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을 “고정된 동일성”으로 간주하고, 그 동일성을 자신의 변증법적 체계와 대립시키는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는 자기 동일성에 머물러 있으며, 변화와 운동을 포함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 모든 게 여기 실체에 있어. 그의 실체 안에서는 더 이상 변화하기 위해 운동할 게 없는 거야. 이게 전부야! 헤겔은 스피노자 철학의 실체는 동양적 몰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듯 힐난하고 있다. 헤겔의 관점에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이미 완성된 것으로서 시작은 본질이지만, 결국 본질에 이르지 못한채 실체 그 안에서 융해되어 버린다. 이것은 헤겔이 강조하는 부정성과 모순의 역동적 운동과 상반되게 보이도록 한다. 가령 씨를 뿌리기 위해 대지를 갈아엎는 농부와 같은 ‘부정의 부정’이 스피노자에게는 전혀 부재하다는 것이다. 헤겔은 역시 곡갱이와 삽의 노동을 강조하는 부정의 철학이다.
하지만 스피노자와 헤겔 모두 실체 또는 절대자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두 철학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반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헤겔의 스피노자는 어떤 오인 혹은 의도에 의해서 이해된/오해된 스피노자일 따름이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자기 원인”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실체가 그 존재와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 외부에 의존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실체가 단일하지만, 무한히 다양한 속성을 통해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연장(물질적 실재)과 사유(정신적 실재) 같은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드러내는 서로 다른 방식이다. 인간의 지성이 이 두 가지만을 인식할 수 있어서 이 두가지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지, 실체는 무한히 많은 속성을 가진다. 또 이 속성들은 실체와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속성이 자신만의 고유한 인과적 질서에 따라 작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실체가 다수성을 가지면서도, 각각은 독립적이고 완전하다는 아주 독특한 함의를 가지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때 속성들의 다수성이 단순한 병렬적 배열이 아니라, 다양한 운동과 활동을 생성하는 역동적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과는 완전히 다른, 실체로부터 속성을 거쳐서 양태로 향하는, 그러니까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운동, 그리고 다시 하늘(실체)을 품게 될 비범한 운동.
모든 진정한 독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폭력적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독해는 고분고분하게 부연하는 데 그칠 것이다. 헤겔이 읽은 스피노자는 스피노자가 실제로 말한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 또는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 담론이 서로에게 행사하는 반작용이다. 그 이유는 이 반작용이 이 담론들에 관해 둘도 없는 계시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두 사람의 친족성이 드러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스피노자에게 맞선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수렴하는 한 지점에서 정반대로 상위성의 동기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헤겔이 제기했던 논박에 미리 답변한 셈이 되었다. 그러고보면 헤겔은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스피노자에게서 읽어내지 못하는 망각과 오해로 스피노자를 대하고 말았다.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스피노자에게 숨겨져 있던 진정한 다수성과 소수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헤겔의 억지스러운 반대추론을 통해 스피노자 철학의 본질적 특징, 그러니까, 스피노자주의가 노리고 있는 다수성과 소수성의 철학을 부각시켜주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헤겔을 끌어들여 자신의 철학의 반대자들에게 더 분명히 논박을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논박한 것들을 헤겔을 통해서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