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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슈뢰딩거,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 / 『슈뢰딩거 나의 세계관』

널리 알려진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대표적인 귀류법적 비판이다. 슈뢰딩거가 고양이의 사고실험을 언급한 것은 인식주체가 관측을 통해 대상을 바꿀 수 있다거나,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상한 이야기에 양자역학이 활용되는 멍청한 상황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의도였다. 그리스에서 이름이 높은 철학자들은 상대에게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할 때면 곧잘 이 귀류법을 활용하곤 했다. 사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도 이런 조롱이 숨어 있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양자역학은 자신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 대해 분명히 지적한다. 양자역학이 주장하는 것은 관측되기 전의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라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어떤 존재자가 관측되면서 존재하지 않던 것이 비로소 ‘고양이’로 구성된다는 뜻도 더더욱 아니다. 단지 관측되기 전까지는 두 가지 상호 배타적인 상태가 ‘수학적으로 공존하다가’(!) 관측한 다음에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양자역학이 이야기하는 것은 인식주체가 관측 내지 측정을 통해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느니,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실재하지 않는다느니 하는 황당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슈뢰딩거의 생각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슈뢰딩거의 자연철학 강의>는 이러한 슈뢰딩거의 입장을 아주 다른 언어-과학자의 철학적 언어-로 엿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자료이다. 나는 슈뢰딩거의 실재에 대한 인식이 아주 흥미롭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이 책의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슈뢰딩거는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의 통찰을 고대 사상과 연결시키면서, 고대 철학자들이 제기한 실재에 대한 문제를 현대 과학이 어떻게 풀어가고 있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실재와는 매우 다른 실재를 제시하는데, 이러한 비유클리드적이고 비직관적인 실재의 모습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하는 실재 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한다.

또 감각을 통해 얻는 정보가 실재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는데, 피타고라스학파가 수학적 사고를 통해서 감각하지 못하는 세계의 실재에 대해서 수학적 공식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한 것에 현대 양자역학이 하는 역할과 같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한 ‘숫자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현대 양자역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양자역학적 실재가 감각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이것을 좀더 슈뢰딩거식으로 들어가보면,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세계는 실재의 일부에 불과하며, 실재는 의식의 작용을 통해 더 깊이 들어가야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수학적 공식과 이성적 추론이다(‘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 관찰하기 전까지는 상호배타적인 상태가 수학적으로 공존한다는 설명을 기억하자!).

여기서 슈뢰딩거의 중대한 관점이 나온다. 완전한 실재는 감각만으로는 인식되지 않고(그러니까, 감각으로 인식된 실재는 전체 실재의 한 부분이다), 수학적 공식과 의식을 통해서만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의식’을 통해 물리적 세계와 실재가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분명히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내가 보기에 여기서 슈뢰딩거식의 ‘의식’이란 수학적 공식과 이성적 추론이 작동하는 장이면서, 그것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실재가 거주하는 곳이다.

그는 여러 챕터에 걸쳐 물리적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연속성 개념이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고방식과 현대 양자역학의 불연속적 세계관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당시 물리학의 주요 이론이었던 파동역학이 연속적인 파동 함수를 사용하여 불연속적인 양자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직면했던 무한소와 연속성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슈뢰딩거는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현대 양자역학의 발전은 물리적 세계의 근본적인 불연속성을 드러내며 연속성 개념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던 사상들은 철저한 상대주의에 의해 일정하게 영향을 받아왔다. 현대 사상은 상대주의적 관점의 다양한 시각이 주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게 어떤 상대주의인지가 관건이긴 하지만, 저변에는 독단론적 절대주의에 대한 혐오가 서려 있기 때문에 일자에 의한 지배를 못견뎌 한다. 그런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슈뢰딩거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사상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그는 오히려 포스트모던이 혐오한 ‘사물 자체’와 ‘이성’ 개념을 여전히 신봉하고, 이성의 전진을 믿고 있는 전형적인 ‘근대’ 과학자이다. 아무튼 슈뢰딩거가 근대 유물론의 총아인 자연과학을 통해서 들어간 실재의 세계는 어쩐지 고도로 구조화된 관념의 실재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학적 공식과 이성적 추론을 실재로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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