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우엘벡, 『지도와 영토』
우리 삶의 슬픔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희망을 품고 엎드려 기어가고, 무릎 세워 수풀을 헤쳐 나가더라도,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허무 속에서 삶을 마감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삶은 불행 그 자체가 아닌가. 평범한 삶조차 그러하다면, 예술가의 삶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레전드가 될 만한 예술가의 수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제한된 수 안에서도 독보적인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하여 우리 심상에 지속되는 사람의 수는 더더욱 한정된다. 더러는 어떤 스캔들이 있고서라야 그런 아우라가 생기기도 한다. 카라바조는 테니스 경기 중 다툼을 벌이다 상대방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도망쳤다. 물론 불안정한 삶은 작품에 강렬하고 극적인 빛과 어둠의 대조로 표현되지만, 불과 38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또 어떤 경우는 인생에 걸쳐 거듭 변신을 감행하고서야 그런 아우라를 겨우 가지게 되기도 한다. 칸딘스키는 초기에 러시아 민속과 풍경화를 주제로 한 구상적 작품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블루 라이더 시절에 그의 작품은 더 대담하고 상징적인 색채를 탐구하며 표현주의에 빠져든다. 결국 마지막 변신을 거쳐서 그는 형태를 완전히 배제하고 색채와 선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추상화의 아우라를 창조했다. 전 생애를 보자면 칸딘스키는 변신 그 자체였다. 그러나 왜 나는 그것이 허무의 삶이라 말하는가.
미셸 우엘벡이 <지도와 영토>에서 창조한 예술가 제드 마르탱은 세번에 걸쳐 변신한다. 첫째는 미슐랭 프랑스 지도들을 촬영한 시기, 두번째 시기는 회화로 방향을 틀어 유명한 직업인을 그린 초상화 시기, 그리고 마지막은 지인들의 사진, 플레이모빌의 피규어, 머더보드가 부식되고 훼손되는 과정을 담은 영상과 식물 위주의 자연 풍경 영상이 중첩된 비디오그램 시기이다. 그러나 우엘벡이 묘사하는 과정은 완전히 상업적인 상품의 여정과 함께한다. 제드 마르탱의 사진 작품은 대기업 미슐렝의 중개로 성공했고, 초상화는 첫째 시기의 성공을 발판으로 전시기획자의 다양한 전략을 거쳐 기업가들이 숭배하는 고가의 작품이 된다. 여기에 작품 속으로 들어온 가상의 작가 ‘미셸 우엘벡’(우엘벡은 자신의 소설에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한다!)의 서문이 명망성을 높여주는데 한 몫 한다. 이 각각의 변신 속에 현대 예술가들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들이 의도했던 예술적 성취는 상업적 성공을 동반하고서야 가능하다. 내가 말하는 슬픔의 실체는 이 불가피한 동반을 말한다. 현대 예술가의 신화는 상업적 성공을 성취해야 비로소 생산된다. 예술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시도와 상업적 성공이 불가피하게 얽히는 과정은 이 소설의 핵심 갈등이다.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거래되고 소비되며, 결국 예술의 상업적 성공이 그 본질적 가치를 희생시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의 예술적 의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이것처럼 허무의 슬픔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물론 그 슬픔을 모르는 예술가들이 태반인 것도 슬픔을 더 배가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제드의 예술적 의도가 과연 순수한 것이냐는 것에도 의문에 부쳐야 한다. 제드의 작품이야말로 하이퍼리얼리티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작품들이 현실의 재현을 넘어, 소비 사회의 요구에 맞게 재구성된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제드의 예술적 지향은 그것 자체로 소비자에 대한 지향으로 둔갑한다. 즉, 제드의 지도 사진 작업은 단순히 지형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사회에서 재구성된 “상품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제드가 애초부터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고 해도 거의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다. 자본주의의 소비장치는 이 자동성을 핵심 기질로 가진다. 이 자동성에 무지하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것이다.
물론 제드가 세 번 변신해 나가는 과정은 이런 자동적인 종속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는 했다. 첫번째 시기인 사진은 기술적 장치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로, 인간의 의도나 통제를 넘어 장치 자체의 프로그램과 규칙에 의해 작동한다. 이는 사진이 단순히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이미지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즉, 그는 사진의 장치성에 자동적으로 종속된다. 사진은 흔히 현실을 정확히 기록한다고 여겨지지만, 사실 사진에 담긴 이미지는 특정한 관점과 코드에 따라 선택되고 구성된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진은 그 자체로 완전한 객관성을 보장하지 못하며, 이는 사진이 현실의 진실을 담는 도구로서 한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제드는 미슐랭 지도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이 지도가 단순히 지형 정보를 제공하는 도구가 아니라 복잡하게 코드화된 상징적 표면임을 깨닫는다.
두번째 시기의 회화 작업은 첫번재 시기의 사진이라는 기술적 장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그린 인물화를 제작하면서, 전통적인 회화의 방식으로 진실을 담으려 했다. 즉, 사진이 단순히 현실을 기록하거나 기계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사진들을 가지고 회화로 옮기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그 이유는 현대의 사진 기술이 작동하는 방식, 즉 장치의 “자동성” 때문이다. 제드는 사진을 회화로 옮기는 방식으로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지만, 결국 사진의 자동화된 본질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회화 작품이 시장에서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가로서 진정성을 추구하려는 제드의 노력이 자동적으로 상업적 과정이 되어버린다는 시장이라는 장치의 자동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제드는 예술적 진실을 추구했지만, 결국 그의 작품은 자본주의적 소비와 상품화의 틀 안에서만 성공을 인정받는다. 자본주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장치의 자동성이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슬픔을 받아들여야만 너의 예술이 가능한 거야.
우엘벡은 너무 비관적이고 너무 냉소적이다. 생애 후반기를 온전히 쏟아부은 마지막 시기 작품의 의미에 대해 제드 마르탱은 일체의 코멘트를 거부한다.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소…… 단지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오.” 책을 다 읽고 나서 돌이켜보건대, 제드 마르탱의 작업들이 내 마음을 그토록 사무치게 남는 까닭은 ‘내가 추구하고자 했던 생각’을 그가 진지하게 구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순수한 사유에 대한 열정, 열정이 다다른 막다른 벽, 그러나 그 벽을 돌파하는 정신, 그러나 미처 알지 못한채 스며든 상업적 장치들과 허무. 그리고 무너저내린 사유들. 단지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 마저 상업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제드 마르탱의 유작들조차 상업적 대상이 되고 소설은 끝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