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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야 의심할 수 있다

의심하기 위해서는 일단 믿어야 한다. ‘믿음의 언덕’이라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 토대를 이루고 있어야, 그중 어느 부분에서 의심이 솟아날 수 있다. 믿음이 없다면 애초에 의심의 마음이나 의욕 자체가 생겨나지 않는다. 원리상 그렇다는 말이다.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의도적이거나 의지적으로 믿는 행위를 통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임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서(보통 사춘기까지의 약 10여 년이라고 해두자) 믿음은 점차 단단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말년에 이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바로 <확실성에 관하여>라는 책에서다. 잘 알려지지 않은 말년의 명작으로, 정말 흥미로운 발상으로 가득한 미완성 초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어라, 믿음이 의심을 만들어내는 밭이로구나!’ 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곳에서는, 오히려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형성되는 시기가 단지 태어난 이후 ‘한동안’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유식학에서 말하는 알라야식은 의식이나 말나식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며, 마음의 작용 결과를 ‘종자’(bīja)로 간직하는 식(識)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저장한다. 경험의 결과가 씨앗처럼 알라야식 속에 저장되었다가, 마치 싹을 틔우듯이 새로운 생각, 언어, 행위를 일으킬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 알라야식은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바로 그 ‘믿음의 언덕’일 것이다. 이 영역은 단순히 통념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불현듯 의심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는 언덕이다. 그래서 알라야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원인과 결과가 새로운 원인과 결과로 전환되며, 그렇게 오늘의 알라야식이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앞뒤가 바뀌며 재구성될 것이다.

요즘 나는 유튜브로 정화 스님의 유식학 강의를 듣고 있다. 정말 재미있다. 삶의 의욕이 샘솟고, 우울감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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