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기 넬슨, 『아르고호의 선원들』

넬슨은 메리 앤 코즈의 강의를 두고, 그녀가 포스트잇 메모지를 머리에 덕지덕지 붙이고 와서 한 장씩 뜯어가며 강의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강의 방식이 좋았다고 말한다. 이 책이 바로 그런 형태다. 평소에 메모해 두었던 포스트잇 메모지를 이어 붙여 책으로 엮은 것 같은 책이다. 책에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이 파편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서사는 한두 단락, 길어야 한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걸어 들어갈 오솔길이 이어진다. 파편적이지만 연속적인. 이 책의 글쓰기적 특이성은 바로 이 파편성과 연속성의 공존에 있다. 이러한 특이성 때문에, 어떤 일관된 서사에 집착하지 않고, 책을 읽는 내내 이야기가 계속 변해간다고 느껴지는 기묘한 책이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이라는 제목은 모든 정체성의 변화를 지향하는 내용상의 의미도 있지만, 글쓰기의 특이성과도 조응한다.
굳이 서사적으로 보자면, 퀴어 엄마인 주인공이 이기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그 서사와 상관없이 계속 짧고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단락들 속에서, 그녀가 공부했던 퀴어 이론과 퀴어로서 겪은 사건들을 아주 평범한 문체로 묘사하며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결국 넬슨은 세지윅이 말한 것처럼, ‘퀴어’가 단순한 성적 지향과는 무관하거나 별 연관이 없는, 각양각색의 저항과 균열, 불일치를 포괄하는 개념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듯하다. 1990년대에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후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던 것처럼, 넬슨은 ‘일반화된 퀴어주의자’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출산을 재생산의 상징으로 여겨 반대하는 급진적 퀴어주의자들과 달리, 넬슨은 퀴어로서 출산을 직접 시도하며, 이를 통해 다른 퀴어로서의 자신을 ‘생산’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아르고호의 선원들』은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봐도 잘 지은 제목이다.
추가로 하나 더. 책의 여러 장면은 철학적으로도 인상 깊은데, 그중 하나는 프로이트의 ‘늑대인간’ 사례를 퀴어하게 변주하는 장면이다. 철학에서 기존 이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나는 늘 주장하지만, 이론은 설명하지 말고 사용해야 한다). 하나는 이론의 골격을 유지한 채, 동일한 프레임을 다른 영역에 적용하여 요소들을 재배치해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정치 이론에 적용하는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역시 이론의 골격은 유지하되, 그 안의 사소한 요소 하나를 완전히 다르게 바꿈으로써 기존 이론의 지향점을 전복하는 방식이다.
프로이트의 ‘늑대인간’ 사례로 보자면, 슬라보예 지젝은 전자의 방식을 따른다. 그는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부정확함이나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데, 이를 ‘페티시즘적 부인’의 형태로 본다. 즉, 사람들은 특정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태다. 이 과정에서 늑대인간 환자는 자신의 증상의 원인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부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주체들도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인식하면서도, (겉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여전히 그에 따라 행동한다.
넬슨은 지젝을 몇몇 장면에서 매우 불편하고 부정적인 철학자로 간접 언급한다. 당연히 매기 넬슨은 ‘늑대인간’ 사례를 전혀 다르게 활용한다(이 과정에서 그녀는 지젝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후배위 성교 장면을 목격하고,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충족되기를 원한다면 어머니처럼 거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건 용납할 수 없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늑대인간은 아버지와 같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어머니처럼 거세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것이 공포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는 어머니의 쾌락이 이야기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오직 이성애적인 섹스에만 기반한 것이다.
넬슨은 이 해석을 뒤집는다. 그녀는 “그건 용납할 수 없다”에서 ‘그것’을 ‘거세’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성적으로 충족되기를 원하는 욕망’으로 바꾼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의 골격은 유지되면서도, 어머니-아버지의 후배위 장면은 게이 남성 간의 섹스를 함의하는 급진적 전환을 맞게 된다. 즉, “그건 용납할 수 없지”는 동성애적 욕망에 대한 공포로 재해석된다. 이렇게 되면 공포와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모든 쾌락이 다시 활성화되며,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쾌락도 복원된다. 기존의 해석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쾌락이 주목되지 않았지만, 동성애적 코드로 읽을 때 이 장면은 극렬한 쾌락의 재활성화로 전환된다.

그리고 넬슨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지점에서 “비규범적이고 비재생산적인 섹슈얼리티, 충직하고 도구적인 것을 넘어서려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찰이다. 늑대인간은 비규범적이고 비재생산적인 섹슈얼리티에 커다란 감동을 느끼는 동시에, 그 비규범성에 대해 깊은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정말 빛나고 아름다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이 해석 이후, 넬슨은 자신의 파트너와의 비재생산적인 섹스 장면을 긴 단락에 걸쳐 묘사하는데, 내가 읽은 섹스 묘사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이었다. 이 장면만 따로 읽어도 충분하다. 이후에도 넬슨은 재생산으로 오해될 수 있는 임신과 출산을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함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한다. 퀴어이면서 동시에 퀴어를 넘어서는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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