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로베르토 에스포지토, 『코무니타스』

어제 저녁부터 오늘까지 온종일 에스포지토의 『코무니타스』를 읽었다. 에스포지토의 글은 예전에 현정철 세미나를 할 때, 김상운 선생이 번역해 온 것을 함께 읽고 토론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은 정말 몰입해서 읽었다. 특히 각 장의 말미에 붙은 ‘여록’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분을 안겨주었다.

여록이란 한자로 餘錄, 한글 뜻으로 보면 본문에서 빠진 나머지 사실의 기록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원전을 찾아 보니까, 그대로 라틴어로 표기된 excursus 이다. 예전에 세네카, 키케로 읽을 때 수사학에서 본문 주제에서 벗어나 일탈하는 하는 것을 두고 엑스쿠르수스라고 한다고 하고, 조금 비난조로 애기 했던 기억이 난다(그게 세네카인지 키케로인지 잘 모르겠다. 제대로된 기억이 아닐지도). 엑스쿠르수스란 주제에서 벗어난 여담, 혹은 보충 설명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자기배려의 책읽기에서 이런 엑스쿠르수스를 시도한 바가 있다. 한편 한편 쓰고 나서, 그 주제와는 다른 여담 형식으로 내 이야기를 몇 페이지 더 쓴 것이다. 지금 보면 그게 바로 여록이었던셈. 물론 신변잡기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지만.

에스포지토는 이 여록을 아주 흥미롭게 사용한다. 본문에서 전개된 논지를 비틀거나 뒤집어, 본문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뜻밖의 방향으로 이끄는 새로운 사유를 보여준다. 예컨대, 홉스에 대한 여록에서는 홉스가 “살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공동체가 구성되었다고 본 주장과 달리, 프로이트를 경유하여 “공동체가 오히려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통해 결속된다”고 말한다(물론 이 주장은 이제는 평범한 것이 되었다. 푸코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또 루소에 대한 여록에서는, 루소가 ‘자기의 팽창’이 공동체를 만든다고 보지만, 바로 그 지점을 치고 들어가, 그 ‘팽창’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오히려 공동체는 사라진다고 역전시킨다. 루소를 루소로 내파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여록에서는, 그녀가 칸트의 ‘숭고’ 개념을 회피함으로써 공동체와 법의 이율배반적인 중첩–즉, 공동체와 법이 동시에 현실적이면서도 초월적이어야 하는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결국 칸트도, 칸트를 비판한 후세의 학자들도 넘어서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등등.

나는 종종 철학이 살아 있는 화석 같다고 생각한다. 모든 살아 있는 철학들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라진 뒤에도 누군가의 입김을 타고 살아남아 떠돈다. 철학들은 자기 세계 속에서 웅크리고, 누군가 불러주기를 바라며 조용히 운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철학들에게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어 다시 떠오르게 해야 한다. 아마 철학자란 그런 바람 같은 존재, 따뜻한 입김 같은 존재들일 것이다.

에스포지토도 홉스, 루소, 아렌트, 하이데거, 바타유에게 입김을 불어넣어 그들을 다시 떠오르게 만든다. 원래는 이 책 한 권만 읽으려 했는데, 이제 『임무니타스』와 『사회 면역』도 함께 읽어야겠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