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베로니카 토필스카, 조세핀 보너버쉬, 『베이비 레인디어』(리처드 개드, 제시카 거닝)

『베이비 레인디어』라는 드라마를 온종일 보았다.

들뢰즈는 인간이 ‘동물-되기’라는 특수한 변용 과정을 겪을 수 있다고 보았다. ‘동물-되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관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그러니까, 대상 자체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고 해서 그 대상을 변화시키거나 변화의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대상을 이해할 때, 그 대상 자체보다는 그것이 맺는 관계들에만 주목한다 하더라도, 그런 관계들이 서로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친다면, 그 방식 역시 새로운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대상 자체만을 보는 것도, 대상들 사이의 관계만을 보는 것도 ‘되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접근은 ‘대상이란 본질적으로 관계들의 총합’이라는 구조주의적 사고방식과 닮아 있다. 그러나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구조주의는 오히려 생성과 변화를 가로막는 퇴행적인 방식이다. “무엇이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만을 반복해서 묘사할 뿐, 그로부터 새로운 삶의 형식이나 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마치 ‘구조의 구조의 구조……’를 무한히 반복해 상상하는 것과 같고, 결국 아무것도 실제로는 생성하지 못하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관료 조직도나 도서관의 분류표만큼이나 비극적인 그림이 또 있을까.

그렇지만 오늘 본 이 드라마는 관계들이 다이내미즘을 일으키며, 매우 실재적인 ‘되기’를 보여주는 놀랍고 아름다운 작품이다(드라마 외적인 논란이나 스캔들은 나에겐 아무런 상관도 없다). 도니의 동물-되기. 도니의 되기는 자기 자신을 생산해내는 실재적 과정을 다이내믹하게 보여준다. 마사와 도니는 마치 말벌과 서양란의 생성 블록과도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이야기라면, 간단한 교양 에세이 한 편으로도 충분할 이야기이고, 이 드라마를 꼭 보아야 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지금까지 꽤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아왔지만, 어떤 의미에서 ‘근원적’이라 부를 수 있는 질문과 대답을 얻은 적은 거의 없었다. 무슨 드라마를 보든, 늘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따라붙는다.
“당신은 왜 이 드라마를 보고 감동을 받았소? 당신은 결국 형편없는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살아갈 텐데 말이오.” 도대체 저 드라마 따위가 개인으로서의 나의 ‘되기’와 사회 속에서의 나의 ‘되기’에 어떤 질문과 대답을 던지는가? 더군다나 이 강력한 신자유주의 체제 안에서 말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게 느껴지는데, 그만큼 신자유주의가 은밀하게 나를 작동시키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모습이란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신자유주의는 자연스럽게 부패와 빈곤, 기만적인 법과 행정 질서,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소수자 억압을 동반한다. 그 비인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따로 클로즈업할 필요도 없다. 그 자체가 커다란 쓰레기장이며, 고요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며, 끔찍한 괴물들이 탄생하는 디스토피아다.

아마 내가 이 드라마에 몰입했던 이유는, 저 ‘동물-되기’의 뒤틀림이 실재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동물-되기는 아주 끔찍한 경로를 거쳐 이루어진다. 사회적 명성에 대한 가짜 말벌의 유혹이 초래한 끔찍한 강간과 폭력, 자기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트랜스젠더와의 이별, 자신과 가족의 오래된 비밀이 폭로되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사-말벌과 도니-서양란은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 그것도 오직 음성적 기호를 통해서만이다. 폭력적인 변용을 거쳐 도달한 조그마한 해방구는, 다름 아닌 스토킹 음성 메시지들과의 대화다. 이 분자적 되기는 아주 작고 조그마한 구멍을 만들어, 그곳을 통해 달아나려 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