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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카우리스마키, 『황혼의 빛』(얀 히티아이넨, 마리아 헤이스카넨)

푸코가 조직했던 G.I.P(감옥 정보 그룹)는 ‘당사자주의’와 관련해 오늘날의 운동에도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 단체는 워낙 탄력적인 조직이라, 그리스도교 단체, 마오주의 단체, 자유주의 단체 등이 모두 관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푸코의 집에 모여 이론상의 차이를 무시한 채, 공공의 적에 맞서 협력했다. ‘주의’나 ‘원칙’ 따위를 내세우며 조직을 과시하지 않았다. 푸코 스스로 “우리는 재소자들에게 의견을 말할 권리를 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더 관심이 가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푸코는 공적으로 알려진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죄수들에게 직접 들은 생활상을 수집했다. 이 단체의 이념이 워낙 유연했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이 있는 교도관이라면 편하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많은 죄수들과 전과자들, 그리고 그 가족들 또한 이 단체가 자신들이 제공한 정보로 이득을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를 건네는 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거의 우리 편이고, 절대 나를 이용하지 않을 거야”라는 감각.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만들기 어려운 감각이다. 사회운동뿐 아니라, 회사든 어떤 공동체든 소수 집단과 협력할 때 반드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황혼의 빛』을 보았다. 뜬금없는 생각일 수 있지만, 그의 카메라가 푸코가 G.I.P.를 운영하며 당사자에게 말할 권리를 부여했던 태도와 같다고 느꼈다. 켄 로치와 달리,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실패한 루저들을 무표정한 카메라로 담아낸다. 그래서 오히려 그 빈자들의 절박한 상태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낙천적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비극성과 낙천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영화다.

모든 것을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이야기이기에, 관객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분노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마치 슬퍼하거나 분노할 틈조차 없다는 듯이. 그저 그대로, 그들은 루저들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당사자인 그들이 비극적 삶을 대하는 낙관적 태도에 경탄하게 된다.

끝없는 슬픔의 장소이자 어둠이 깔린 헬싱키는, 도시 전체가 대출 담당자처럼 차가운 사디스트로 가득한 듯하다. 그러나 주인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변명 없이 삶을 돌파하는 프롤레타리아의 강력한 힘을 웅변한다. 내가 원했던 바로 그 얼굴이 아니었던가.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는, 아일라가 주인공이 새 여자친구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조용히 떠날 때다. 절제된 슬픔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그 장면은 깊은 울림을 준다. 연대는 바로 그 절제된 기다림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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