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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물론 신다윈주의, 발생학, 구조주의 진화론 등을 모르는 나로서는 읽는 과정에서 오류가 많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읽은 부분만 가지고라도 생각을 정리해 두어야겠다.

다윈 진화 이론의 정수는 ‘자연 선택’이다. 그런데 자연 선택은 설계가 아니라 땜장이다(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자연 선택은 무에서 절대적인 완벽함을 이루어 내는 설계자와 달리, 주어진 재료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한 창조나 안내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물론 개체의 적응에 영향을 미치는 속성은 무수히 많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 선택은 오랜 세월 작용하면서 동식물을 마치 설계된 듯한 형태로 조각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조화와 아름다움은 자연 선택의 효과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화와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적응에 실패한 무수한 사례들이 숨어 있다.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았던 종수의 99퍼센트가 넘는 생명체가 멸종했다고 한다. 이 사실만 보아도 지적 설계론의 오류가 드러난다. 끝내 멸종할 수백만 종을 설계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20세기 초반 소세키가 고양이의 입을 통해 조롱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신이 인간의 수만큼 많은 얼굴을 제조했다고 하는데 과연 처음처럼 흉중에 무슨 계산이 있어 그런 변화를 꾀했는지, 아니면 고양이든 주걱이든 모두 같은 얼굴로 만들려고 시도했는데 뜻하는 바대로 잘되지 않아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전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인 무능이라고 해도 별 지장은 없다”(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이렇듯 생물체는 추첨이나 다름없는 돌연변이에 운을 맡긴다. 하지만 생명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도 이미 존재하는 속성에 일부 변화를 가할 뿐이다. 완전히 새로운 속성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구조주의 진화론’은 별도의 문제로 두자). 더군다나 완벽한 적응을 이끌지도 못한다. 그저 이전에 있던 것을 개량할 뿐이다. 언제나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럭저럭 환경에 적응한다. 자연 선택은 더 잘 적응하는 것을 만들 뿐, 최고로 잘 적응한 존재를 만들지는 않는다.

예컨대 어류의 생식샘은 배 속에서 생겨 배 속에 남아 있다. 우리 인간도 처음에는 어류와 비슷하게 내부 고환으로 시작했지만, 내부 열기를 피하기 위해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면서 결국 어정쩡하게 체벽에 붙게 되었다. 그래서 남성은 탈장에 걸리기 쉽다. 이쯤 되면 세계가 마냥 조화롭고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끊임없이 상호 적응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정쩡한 모습일 뿐이다.

물론 자연 선택이 아닌 과정들도 진화적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족마다 자손의 수가 달라 유전자의 비율이 무작위로 변하는 ‘유전자 부동’이 그것이다. 그것은 ‘적응’과 무관하다. 따라서 자연 선택과 달리 유전자 부동은 생물을 조각하는 힘이 없다. 진화에 미치는 영향 또한 미미하다. 결국 자연 선택이야말로 유일하게 적응을 빚어내는 힘이다. 그러나 유전자 부동 역시 어정쩡하긴 매한가지다. 단지 우연의 세계를 더 분명하게 보여줄 뿐이다. 진화는 결국 우연에 의해 매순간 어정쩡해지는 모습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진화의 역사는 ‘상호 적응의 관계들’이 변해온 경로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순간순간 자신을 몰아세워 그 순간의 관계에 간신히 맞춰 왔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생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그럭저럭 세상을 돌파해 나간다. 아마도 현재의 종들이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즉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살아남아 있는 종의 형태가 과거 활동하던 종의 형태보다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순간 타 개체들과 최소한의 관계성을 확보한 존재일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를 발전이나 완성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인간 정신’이 지닌 유전적 결함일지도 모르겠다.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극히 제한된 시기의 어정쩡한 상호 적응 관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유전적 결함은 그런 어정쩡한 관계를 불편해한다. 어쩌면 지적 설계론 자체가 우리들의 어정쩡함 때문에 생겨난 결함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은 일란성 쌍생아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어정쩡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어정쩡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일은 오히려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아름다움은 신의 역할이 아니라 인간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어정쩡한 계보 위에서 아름다움을 생산하는 일의 출발일 것이다. 혹시 진화가 아름답다면, 그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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